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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는 초한지다

필요한 조각,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곳에

어릴 적에 많이 갖고 놀았던 레고에 다시 손을 댔다. 20년도 넘게 이별했던 (?) 장난감과 다시 놀려니 익숙하지 않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요즘처럼 밖에서 놀 수 없는 시점에서는 최고의 놀잇감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레고를 조립하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든다.


작은 조각의 마력


레고의 가장 큰 매력은 필요한 조각이 없으면 조립을 진행할 수 없다는 부분에 있다. 처음에 수백 개의 조각을 펼쳐놓고 보면 조금은 막막하다. 이 조각들이 어디에 쓸모있는지, 정말 조립 과정에 필요한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막상 조립을 시작할 때면, 손으로 잡기도 힘들어서 손톱이 고생할 정도로 작은 조각 1개만 없어도 어딘가 허전하다. 공장에서의 조립 공정이 막힌 듯한 기분이다. 


그 사소한 작은 조각이 어느 부문을 채워넣는 순간,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키를 꽂을 주인이 정해진 마스터 키와도 같다고 해야 할까. 요즘에 조립하는 레고 자동차를 보고 있자면, 이 조각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잘 사용해야만 조립의 기쁨을 느낄 것만 같다. 물론 나도 모르게 떨어져서 침대 밑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하지만, 덕분에 조각 하나하나가 제 자리를 찾도록 하기 위한 집중력을 끌어올릴 수는 있다.

어떻게 보면 작은 소일거리, 놀잇감이 되겠지만, 레고 블록만큼 인재 경영의 표준을 보여주는 모형도 없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조각을 찾아서 끼워넣는 것처럼, 인재를 적재적소에 필요한 만큼 기용하는 것이 인재 경영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블록을 갖고 노는 사람이 아니라, 공정 단계별로 필요한 조각을 눈을 부릅뜨고 찾는 채용자일 지도 모르겠다. 1g도 안 되는 그 조각의 마력이 이렇게 강했나 싶다.


초한지는 조각 끼워넣기로 갈렸다


엉뚱할 지도 모르겠지만, 레고 조립을 하면서 자꾸 떠오르는 게 초한지다. 항적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의 세기의 대결을 그린 초한지를 보면, 두 사람의 승패는 인재 경영에서 갈렸다. 본인의 직속 부하들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고 기용하지 못한 항적과 달리, 유방은 난세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이들을 적절하게 대우하고 기용하면서 초한 전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실제로 유방은 "항적은 범증 (항적의 군사) 한 명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게 나와 항적의 차이다."라고 했을 정도니, 인재 경영의 차이는 승패를 가른다.

인재를 쓰는 자와 억압하는 자

기동력을 내세워 군대를 움직이는 팽월에게는 쉴 새 없이 항적의 후방을 교란하게 만들었고, 초현에서 행정 경험이 풍부했던 소하에게는 군량 보급을 맡겼다. 병법과 지휘에 통달했던 한신에게는 대장군의 지위와 함께 북벌의 전권을 위임했다. 각자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유방의 한나라는 내정 운영과 군대 지휘에서 아귀가 맞아떨어질 수 있었다. 유방의 한나라를 레고로 비유하자면, 레고의 크기는 작을 지라도 조각이 제 위치를 찾았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 


항적에게는 그런 조각 활용 능력이 없었다. 항적이 유방보다 군세는 분명히 우위였지만 매번 잡음이 일었다. 보급 문제가 매 전쟁마다 말썽을 일으켰고, 항적의 장수들은 역할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공을 세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초나라라는 레고는 필요한 레고 조각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을 제대로 조립하지 않은 상태로 아무렇게나 끼워맞춘 셈이다. 크기가 백날 커봐야, 제대로 조립되지 않은 레고는 조금만 충격을 줘도 쉽게 부서진다. 항적이 패배한 전투는 단 한 번이지만, 그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것을 잃었다.


조각 끼워맞추기, 즉 인재의 적절한 배치와 분담은 조직의 단단함을 결정한다. 제 자리에 조각을 끼웠을 때, 그 조직은 훨씬 단단하다. 조각의 크기와 상관없이, 어디에 어울리느냐가 중요하다.  


조각의 힘


직장 생활을 해본 이라면, 담당자 몇 명이 빠졌을 뿐인데 팀의 실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나사 1~2개만 없어도 선풍기가 고장나듯, 작은 조각 1~2개만 빠져도 팀의 업무 순환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자리에 있어야 할 작은 조각의 존재감이다.


일선에서 실무를 지휘하는 이, 조직을 대표하는 이만 중요하지 않다. 작은 조각 하나라도 그 중요성은 충분히 지니고 있다. 레고는 작은 블록 1개만 빠져도 조립 진행이 안 되듯, 조직에서 사소한 자리가 비어도 추진력에 타격이 생긴다. 작은 크기의 실무라고 해도,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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