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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와 에르빈 롬멜

지나간 데이터에서 찾는 새로운 보물

지나간 것을 지나간 대로 기억하고 그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을 때가 있다. 과거의 보물 상자 안에는 지금을 위한 황금 열쇠가 발견되기 마련. 나도 몰랐던 귀중한 장난감이 숨겨져 있고, 그토록 찾던 노트가 숨어 있다. 데이터라도 좋고, 그림이라도 좋다. 


다만 지나간 것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면, 보는 눈은 이전과 달라야 한다. 과거의 자료를 있는 그대로 쓴다면, 과거의 보물을 그 때의 방식대로 보관한다면, 이전의 과정만 반복될 뿐 가치의 재발견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각도로, 얼마나 새롭게 맥락을 읽어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재해석이라고 부르고, 한 단계 발전하면 재발견이자 재창조가 된다.


영광을 위한 열쇠, 과거에서 찾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만 13번이나 우승한 레알 마드리드는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축구 명문 구단이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매번 영광의 시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2년에 9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후로 한동안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 일명 빅 이어 (Big Ear) 와 지독히도 인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레알 마드리드가 2014년에 실로 오랜만에 기회를 잡았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4강 길목에서 독일 최강의 축구 클럽, 바이에른 뮌헨을 만났다. FC 바르셀로나를 2009년에 6관왕으로 이끌었던 펩 과르디올라 감독 체제 하에서 화려한 라인업과 최신 축구 전술로 무장한 바이에른 뮌헨은 레알 마드리드 입장에서 힘든 상대였다. 반면에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 자국리그인 프리메라리가에서도 최강이라고 불리기 쉽지 않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전력의 우세를 점한 바이에른 뮌헨의 결승 진출을 점치는 이들도 많았다.


그 험난한 길을 뚫기 위해 선택한 열쇠는 의외로 간단했다. 최신 유행을 반영한 전술에 대한 맞춤형 대응이 아닌, 고전적인 압박 축구였다. 간략하게 얘기하면 4-4-2 (수비 4명, 미드필더 4명, 공격수 2명) 포메이션과 4-3-3 포메이션을 적절하게 배합한 압박이었는데,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나 유행했던 곰팡내 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과 지네딘 지단 수석코치는 옛날 전술의 효용성을 믿었다.


효과는 완벽했다. 바이에른 뮌헨을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1-0으로 격파한 데 이어, 원정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4-0으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선수 간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상대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단순화시킨 결과였다. 옛날 축구의 원리는 간단했지만, 그 간단한 원리를 창조적으로 재발견한 덕에 레알 마드리드는 예상밖의 대승을 따냈다.


무리하게 유행을 따르지 않고, 과거의 전술을 재활용한 효과는 결승전에서도 드러났다. 레알 마드리드의 결승 상대였던 아틀레티코 (AT) 마드리드는 많은 활동량과 실리적인 전술을 추구하는 클럽이었다. 기본적으로 많이 움직이되, 효율적인 패턴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팀이었기에 어설픈 작전은 통하지 않았다. 그런 AT 마드리드를 상대로 고전적인 압박 축구로 맞불을 놓은 덕에 기세에서 밀리지 않는 효과를 거뒀다. 결국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AT 마드리드를 꺾고, 통산 10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4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양팀 포메이션 (위 : AT 마드리드, 아래 : 레알 마드리드)

단순히 과거의 전술을 차용하기만 했다면, 원하는 결과를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술에 대한 데이터는 과거부터 누적되기 때문에, 단순한 재활용은 철 지난 무기를 꺼내드는 것에 불과하다. 옛날 무기가 어떻게 이토록 날카롭게 재탄생할 수 있었을까? 에르빈 롬멜을 보면 감을 찾을 수 있다.


롬멜의 창조적인 데이터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통틀어 독일군 최고의 장군으로 꼽히는 에르빈 롬멜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롬멜이 1차 대전 경험으로 저술한 <보병 전술>의 주 내용은 적의 병력과 화력이 우세해도 철저히 준비를 갖추고 기습 형태의 맹공을 연속적으로 실시하면 이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수비 상황에서는 일사분란한 후퇴 후 적의 전력 분산의 빈틈을 노려 재역공을 가하는 패턴을 강조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병 대대의 인원이 몇 명이고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철저한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일단 롬멜은 본인이 출진 여부와 상관없이 광적으로 기존의 전쟁 데이터를 수집했는데, 참호의 간격에 따른 사상자 발생 확률부터 고개를 숙이는 각도에 따른 포탄 회피 확률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전쟁 상황의 시나리오를 최대한 자세하게 나눠서 데이터를 수집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데이터를 모아서 정리하기만 했다면, 롬멜이 다른 장군들과 구별되지 않았으리라. 롬멜은 데이터를 창조적으로 재활용했던 장군이었다. 이를테면 아군의 참호 위치, 적군의 포격 시나리오에 관한 데이터를 보고 새로운 전술을 고안해냈다. 데이터를 보고 고개만 끄덕이고 일차원적인 판단을 한다면, 그렇게 광적으로 자료를 모으는 의미가 없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롬멜은 본인이 수집한 데이터를 토대로 여러 가지 새로운 시나리오를 구상했고, 이를 부대 구성원들에게 일일이 인지시키고자 했다. 창조적인 움직임을 부대 전체가 구현하려면, 구성원 모두가 과정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도가 뒷받침되어야 창조적 전술로 이전의 피해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롬멜은 과거의 전쟁 데이터를 승리를 위한 새로운 무기로 재탄생시킨 셈이다.


레알 마드리드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전술, 기존의 데이터를 현대적으로 적용하여 또다른 무기로 재탄생시킨 셈이다. 어쩌면 이것도 리트로 (Retro) 마케팅의 일종일 수 있겠는데, 이는 과거의 유산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활용하는 이가 시장의 승리자가 된다는 교훈을 인지시킨다. 옛날 포메이션을 그냥 갖다붙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적용시킬 수 있는 강점을 창의적으로 편집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터다.


숫자 놀음이 아닌 통찰


내가 모은 숫자, 과거에 모여 있던 자료를 그냥 표나 그래프로 정리한다든지, 아니면 표면적인 결론만 내리는 것은 데이터 표본 수집의 의미가 없다. 우리가 지금 빅 데이터의 개념까지 끌어들인 것은 단순히 숫자 놀음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많은 숫자 속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목적이다. 


과거의 데이터는 분명 현재를 위한 열쇠를 품고 있다. 그 유산을 찾기 위한 여정에 필요한 것은 숫자 놀음이 아니라 숫자 편집을 통한 통찰이다. 그런 편집의 과정과 사고를 우리는 창의력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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