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공존의 필요성
COVID-19 때문에 삶의 의욕은 사라지고, 오만 가지의 잡념만 남아 있다. 즐길 거리가 모조리 사라져서 그런지, 요즘 몇몇 물음들이 수없이 뇌를 스쳐가곤 한다. 나도 모르게 스쳐가는 수많은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혼란스럽기도 하다.
최근에 자주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적대적 공존이다. 공존이라는 게 꼭 좋은 의미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 박정희와 김일성, 직장 내 팀장과 팀원, 석탄 공장과 환경 단체... 그들은 결코 서로를 우호적으로 여기지 못해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때도 있다. 하지만 막상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이 존재 의미가 급격히 퇴색된다. 아니면, 존재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부단한 진화 과정을 거친다.
범죄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경찰이나 탐정, 프로파일러가 필요할까? 범죄자와 경찰은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을 반복하며 발전한다. 적대적 공존 속에서 펼쳐지는 도전과 응전은 범죄 수사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경찰, 탐정, 프로파일러의 수사 기법 역시 발전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고 쫓는 시간이 의미를 가지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서로가 존재했어야 한다.
셜록 홈즈도 그렇게 진화해 온 캐릭터다. 범죄자들이 숨기 딱 좋은 어두운 도시가 된 런던, 그 런던 안에 서식하는 수많은 지능적인 범죄자들을 쫓는 과정에서 셜록 홈즈의 추리력이 빛을 발한다. 범죄 수사를 하지 않는 홈즈는 화학 실험과 독한 담배, 몽상밖에 모르는 싱글남이지만, 범죄자들의 세계에 뛰어드는 순간 홈즈는 유럽 최고의 사립 탐정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갖는다.
셜록 홈즈의 행보를 보면, 적대적 공존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토록 범죄자들과 숱한 사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최대의 적이었던 모리어티 교수가 죽자 런던을 따분한 도시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런던의 범죄 거물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미련없이 런던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 양봉을 한다. 시소 반대편에 있던 범죄자들이 없으니, 자신도 시소 위에 서 있는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적대적 공존이 발생시키는 균형은 팽팽하기 그지 없어, 한쪽이 무너지면 반대쪽도 무너진다.
이런 적대적 공존의 의미를 알게 하는 또다른 이가 있으니, 바로 플라톤이다. 고대 그리스가 소피스트들의 화술, 어그러진 직접민주주의로 흔들릴 때 등장한 이가 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이었다. 무엇이 진짜인 지 알 수 없으며 말의 논리조차 의심스러웠던 시점에, 모두가 알아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를 역설했던 철학자의 등장은 그리스 철학의 뼈대는 물론, 철학 전체의 뼈대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한발 더 나아가, 기준 없는 분쟁과 삶의 방향성을 정립하기 위한 윤리의 본질을 제시했다.
달리 생각해보면, 거짓도 사실로 둔갑시키는 소피스트들의 화술이 난무하지 않았다면 플라톤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그리스 시민들 모두가 나 자신을 알려고 스스로를 설파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책을 읽을 줄 모르고, 때가 되면 전쟁터에 끌려나가는 이름없는 시민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폴리스가 처음부터 만물을 관통하는 진리의 이데아였다면, 플라톤 역시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논리와 깊이가 사라진 아고라 광장이 있었기에, 그 광장을 바로세우고자 플라톤이 나타난 셈이다.
나의 반대편에는 대개 나와 적대하는 이가 서 있다. 나와 뜻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며, 나를 자극하기까지 하는 숙적이다. 어쩌면 사람의 삶은 숙적과의 투쟁이자, 만인과의 투쟁일 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숙적이 사라졌을 때, 그 기쁨은 잠시다. 나의 실존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숙적과의 적대적 공존을 이루는 시소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나도 시소 밑에 깔린다.
라이벌 기업 간의 M&A가 때로는 금기가 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나이키가 아디다스를 집어삼켰다고 해서 나이키의 위상이 더 빛나지는 못한다.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를 합병한다면, 삼성전자의 반도체가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설 수 있을까? 외형적인 시장점유율 숫자로만 보면 최고라고 여겨지겠지만, 그 순간 그 기업들의 존재 의미는 퇴색된다. 나이키가 가지는 브랜드 경쟁력은 의미가 없고, 삼성전자 반도체가 가지는 색깔과 경쟁력에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나를 위해서라도 숙적의 존재를 받아들여만 한다. 바이러스가 없다면 백신도 없고, 오염 물질이 없다면 친환경 단체도 없다. 스스로를 자극하여 강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숙적의 존재가 곧 나의 존재와 연결된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이 사라졌을 때의 허전함, 미운 정의 무서움도 달리 보면 적대적 공존이 만들어낸 감정이 아닐 지.
히어로 영화나 만화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악당이 떠나는 순간 주인공의 존재도 의미가 없어진다. 타노스와 어벤저스는 그렇게 공존하는 관계다. 악당의 소멸과 함께, 히어로들은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고 잠든다.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이 만드는 균형, 그것이 삶을 지탱하는 긴장감이다. 반대편과의 팽팽한 균형을 깨지 않으면서 버티는 나를 만드는 것, 그것이 자아의 경쟁력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