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고효율의 현실로
주말에 책을 한 권 읽었다. <니체와 고흐>라는 책인데, 19세기 유럽을 주저앉혔던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글, 고통과 몽상을 화폭에 담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한 곳에 담아낸 책이다. 사람을 자극하는 니체의 글귀, 사람의 감각을 진정시키는 고흐의 그림이 묘하게 어울리는데, 어찌 보면 현실과 몽상 사이를 오가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스포츠 기업이 있다. 화려한 족적을 남겼으나, 지금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공룡 기업인 AC 밀란이다.
쉽게 변하지 못하는 공룡 기업이 된 AC 밀란을 어디서부터 수술해야 할까.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명문이라는 간판조차 이제는 어색하기 그지없고, 그들의 찬란한 과거는 현재를 조롱하는 무기가 되고 만다. 한때 자기네가 세계 1위 전자업체였다며, 휘황찬란한 과거만 애써 들먹이는 소니와 다를 게 없다. 그들의 별칭인 로쏘네리가 예전에는 존경과 공포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흘러간 옛 추억밖에 되지 못한다. UEFA 챔피언스리그 7회 우승, 세리에 A 정규리그 우승 18회 등의 업적도 이제는 유물이다.
로쏘네리여, 과거는 죽었다!
니체의 대표적인 명언인 "신은 죽었다."를 곱씹어보면, 인류가 믿는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 스스로를 부정하는 장치가 되어가고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설정한 우상이 사람을 과거 속에 가두게 만들고 지금의 나를 부정하게 만드는 덫이 되고 만다. 니체는 그렇게 활력을 잃어가는 인간들을 위해, 사람이 은폐된 치욕만 바라보는 시간에 파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고 그렇게도 소리쳐 왔다. 관념 속의 신을 지워야, 현실에 발 붙인 인간이 자신의 생각대로 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AC 밀란은 1960년대 이후로 트로피와 멀어진 적이 딱히 없다. 역사를 10년 단위로 끊어서 보면, 정규리그 우승은 물론 챔피언스리그와 같은 클럽대항전 트로피 역시 AC 밀란의 손때가 어지간히도 묻어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로쏘네리의 황금기다. 마침 그들의 뒤에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자본력이 있었으니, 축구의 땅 유럽에서조차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공룡이 되어 갔다. 한때 이탈리아의 프로축구 구단들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축구단 운영에 돈을 아끼지 않던 시절에도 AC 밀란의 위상은 한 수 위였다.
그렇게 여기저기 영향력을 미치는 공룡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던 것도 과거지사다. 2010년에 AC 밀란의 손에 들려진 트로피는 2011년 정규리그 우승 트로피, 2016년 이탈리아 슈퍼컵 트로피 뿐이다. 챔피언스리그와 같은 유럽클럽대항전 트로피는 흐린 기억 속의 그대다. AC 밀란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도 한없이 떨어지고 있다. 이렇게 현실이 녹록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AC 밀란은 오직 과거를 생각하고 과거를 되찾는다는 생각밖에 없다. 전지전능하다고 믿기까지 했던 과거를 떨치지 못하니,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른다. 그래서 매 시즌 나아지는 게 없다.
니체가 AC 밀란의 팬이었다면, 현 구단주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AC 밀란 경영진에게 호통을 치지 않았을까. 당신들이 신처럼 추앙하던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런 과거에 묻힐수록, 지금의 자신만 한없이 추해질 뿐이라고.
현실을 위한 고통의 길
이렇게 과거에 갇힌 보석, AC 밀란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중대한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직 단장 즈보르니크 보반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레드불 라이프치히의 단장인 랄프 랑닉을 단장 겸 감독으로 부임할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단장 겸 감독은 밀란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다.
랄프 랑닉의 위치는 조금 독특하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레드불 라이프치히의 단장을 맡고 있는데, 이전에는 레드불 라이프치히 단장직과 오스트리아의 레드불 잘츠부르크 단장직을 겸했다. 게다가 지금은 미국 MLS의 뉴욕 레드불스의 단장을 겸직한다. 랑닉은 특정 축구 클럽의 디렉터가 아닌, 레드불의 축구 디렉터다. 한 클럽을 위한 감독이라기보다, 모기업의 스포츠 비즈니스를 위한 관리자에 가깝다.
전통적인 유럽 스포츠 클럽의 직업 체계와는 많이 다르다. 이탈리아 축구계는 예로부터 디렉터와 감독의 역할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으며, 디렉터와 감독이 서로의 업무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독일 분데스리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 특정 모기업의 스포츠 디렉터에게 클럽 감독과 디렉터 역할을 모두 주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만약 AC 밀란이 랑닉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체제로 변하게 된다면, 이는 AC 밀란의 전면적인 개혁을 뜻한다. 과거의 스타 군단에서 벗어나, 매니지먼트 지휘 하에 선수 관리와 육성 및 구단 수익성에 집중하는 실속형 구단으로 변하겠다는 뜻이다. 레드불의 스포츠 정책은 오랫동안 현실적인 실속을 추구해 왔기에, 밀란에게는 구단의 색깔을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이자 체질 개선이다.
당연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과거의 관습을 바꾸고, 지금의 업무 프로레스를 바꾸는 일이다. 조직의 업무를 바꾼다는 것은 결국 AC 밀란의 팬들이나 소비자를 위한 밸류 체인 (Value Chain) 변화를 의미한다. 그 동안 로쏘네리 팬들에게 영광의 시간을 판매했다면, 이제는 새로운 환경과 필드 위에서 성장하는 새싹을 위한 기다림을 판매하게 된다. 20년간 아르센 벵거 체제 하에서 유망주 화수분 체제를 만들어냈던 아스날의 길을 걸어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변화의 고통 속에서 사람이 진정한 자아를 찾는 법이다. 니체는 신을 거부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고통 속에서 자아를 찾는 자가 시대를 이끄는 초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AC 밀란은 한동안 고통 속의 체질 개선과 구단 운영을 거쳐가야 하지만, 그 고통을 거쳐야만 진짜 강점을 찾고 문제를 타개하며 실속형 기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올 시즌 중반에 내일 모레 40세가 되는 과거형 스타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영입한 것은 임시 방편일 뿐이다. 2020년 여름부터 진짜 자신을 찾는 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