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나 자기한테 불만 많아
남편에게 한 달에 한 번씩은 하게 되는 말이다. 사실 나의 결혼생활, 육아생활은 불만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건 육아와 집안일이 거의 내 몫인 처지인 데에서 기인한다.
일주일에 7일,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시간 외에는 육아에 매여 있다. 남편은 주말에 주로 일을 하고, 주중에도 항상 돈벌이를 하고 있는 자영업자다. 주중에는 남편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줄 때도 있고, 저녁에 목욕을 시켜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육아, 집안일은 내가 하고 있다. 참 관계는 상대적이라서, 더러움과 기꺼이 함께 사는 남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더러운 내가 유난 떨며 청소를 하고 있다. 음식도 내가 한다. 집안일에 대해서 남편은 내가 요청할 시에만 움직인다.
남편이 경제적인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밤낮없이 돈 벌 궁리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머리만 대면 곯아떨어지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집안일은 내가 하자' 생각하면서도 가끔씩 치고 올라오는 불만은 어쩔 수 없다. 나의 자제심이 발휘되는 약 1-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불만의 시기가 찾아온다. 그때는 걷잡을 수 없이 예민해져서 그걸 남편에게 표출하고, 남편은 그런 나를 받아주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요즘 우리의 결혼생활은 그렇다. 내가 불만을 말하면 남편이 그 불만을 수용하거나, 부딪히거나 하는 일의 반복. 나의 이 불만은 육아와 집안일의 무게 때문이 반, 다른 반은 기본적인 내 성정과 관련이 있다. 모든 일에서 부정적인 면을 먼저 찾아내고, 사람들의 말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표정부터 굳어버리고 직언을 하고야 마는 성격. 그게 직장상사든 시어머니든 말이다.
출산 전 나는 온전히 나 자신에만 집중하던 시간을 보냈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드라마를 하고 싶어 퇴사를 했고, 남들보다 늦게 방송작가가 되어 영상, 글쓰기 그 언저리에서 빙빙 돌며 30대를 살았다. 남편을 만나서도 온 세상은 내 중심이었다. 나의 꿈에 다가가고,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중요했다.
결혼 후에도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에 매달려온 나는,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컨대 육아하는 삶에 '나'라곤 없어졌다. 온 세상이 내 중심이던 나에게 나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뿜는 인간이 생긴 것이다. 아토피기가 있어 자주 볼이 빨개지는, 요즘 너무 엄마를 좋아해 잠시도 엄마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고, 치즈, 우유, 네, 알았다, 찾았다 등의 생존 단어를 20여 개 구사하며, 잠투정이 유난히도 심한 이제 두 돌을 앞두고 있는 사랑스러운 딸아이 댕이. 댕이의 존재가 내 인생을 뿌리째 뒤흔들었음은 물론이다.
댕이와의 만남은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를 단절시켰다. 일단 표면적으로 나는 경단녀가 되었다. 2년 동안 방송 일을 쉬었고, 지금은 상황상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아이를 전적으로 내가 키우기 때문이다. 시댁은 멀고, 친정은 가깝지만 동생의 아이를 키우시느라 몇 번 엠뷸런스에 실려가신 바 있는 엄마에게 또 아이를 맡길 순 없었다. 베이비시터를 고용해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하는 선택지가 있겠지만, 그쪽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내가 몸 담았던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나인 투 식스가 아니라서 그렇다. 일을 하더라도 퇴근을 해서 아이를 넘겨받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지 않으며 고용도 안정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주말까지 일하는 남편이 일을 끝내고 와서 아이를 볼 수 있는 여건도 안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돈 문제가 어떻든 아이를 내 손으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전업주부, 특히 아이 엄마가 된다는 건 그전까지 인생에서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잠시 한편에 두고, 서툴고 낯선 일을 시작하게 만든다. 아침에 남편과 아이보다 일찍 일어나 밥을 하는 일, 아이와 남편의 식사를 챙기는 일, 잠을 자다가도 아이의 기침 소리에 벌떡 일어나 체온계를 들고 설치는 일, 내 옷이 아닌 아이의 기저귀와 우유를 주문하는 일... 그런 반복적인 일들 속에 나라는 사람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잊어간다. 아이가 밤에 자지러지게 울 때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을 때는 내가 이렇게 무능력한 사람이었던가 생각한다.
아이를 뱃속에 품고 만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의 준비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육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낯선 것이었다. 난 생각보다 더 허둥대고 혼란스러웠다. 익숙해서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했을 때 다른 새로운 미션이 '까꿍'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물론 힘든 만큼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이 있다. 아이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파고들 때 울컥울컥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들. 코끝이 찡해지기도 하고, 이 작은 생명체가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며 묵직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아이와의 만남은 '나'라는 인간을 해체시켜 새로 조립하는 과정이다. 나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뿜는 아이와의 생활은 나를 하나하나 분해하고, 또다시 하나하나 조립해간다. 그 과정은 아이가 커 가는 속도만큼 매우 더디다. 하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내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매일 뉴스 사회면만 뒤적이던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매일 동화책을 읽는 사람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난 그 경험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육아가 나를 분해해 새로운 부품을 밀어 넣고 있는 과정을. 때로는 고통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깨달음이기도 한 그 과정을 하나씩 풀어놓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