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해주지 않던 고통
댕이가 첫아기다. 당연히 출산의 경험도 없었다. 산통에 대해 막연히 '아프겠지' 했다. 주위에 아이 낳은 엄마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로부터 산통의 정도에 대해서 들은 적이 별로 없었다. 제일 빨리 시집가 친구들 중 가장 빨리 출산을 경험한 친구는 소리 한번 안 지르고 우아하게 아이를 낳은 일화로 유명했고, 내 친동생도 진통 한 시간 만에 수월하게 아기를 낳았다. 그들은 출산이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임신 중에 경험자들에게 주로 듣는 얘긴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한 거야" 정도. 막상 산통에 대해 물어보면 "아프지. 그래도 무통주사 맞으면 살만해" 정도였다. 그들은 출산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육아의 고통은 영원하다고 이야기했다.
나에게 산통이 매우 아프다고 경고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내가 임신 8개월 때 결혼식장에서 만난 아는 동생은 3개월 전에 출산한 상태였다. 얼마나 아픈지 물어봤더니, 정색을 한다.
언니 진~짜 아파. 욕 나와.
이 동생은 무통주사를 안 맞았다고 했다. 욕 나오는 아픔은 어느 정도일까. 그건 짐작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예정일 일주일 전, 이미 뱃속의 아기는 3.4kg라고 했다. 댕이는 나올 기미가 없었고, 결국 예정일이 되어서야 이슬이 약간 비쳤다. 약간씩 양수가 흐르고 있어 바로 입원을 했다. 병원에서 반나절을 보냈지만, 아기는 나올 생각을 안 했고 결국 유도분만이 결정됐다. 새벽같이 분만장으로 향했다.
유도 촉진제를 맞았다. 남편이 가족분만장에 같이 들어왔다. 주사를 맞은 지 한 시간 만에 진통이 시작됐다. 통증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누워있을 수도 앉을 수도 소리 지를 수도 없는 통증.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그저 입 속에서 아주 가는 신음소리만 흘러나왔다.
가족분만장에는 TV가 있었다. 간호사가 TV를 틀어주었는데, 그걸 보고 있는 남편을 보니 짜증이 났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TV를 보고 있다니. TV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내 예민한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웃는단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TV를 꺼도 별 수는 없었다. 내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깔고 있는 패드에 자꾸 피가 흘렀다. 진통이 오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왜 그리 소변이 마려웠던지 피를 질질 흘리며, 남편의 부축을 받아 분만장 안에 있는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다. 혼자 움직일 수 없었기에 그의 손을 붙잡고 변기에 앉았다. 혼자만의 공간에 남편을 들이니 부끄러움이 살짝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통이 그만큼 심했다.
한 시간 정도 흐르자 진통은 더 자주 왔고, 진통이 오지 않는 시간은 10초, 15초에 불과했다. 남편의 어깨를 붙들고 몸부림쳤다. 이제 내가 믿을 건 무통주사뿐이었다. 무통주사만 맞으면, 이 고통이 덜해지리라. 많은 산모들이 한결 같이 이야기하던 그 무통의 신비를 이제 나도 경험할 수 있겠지. 5시간의 진통 시간 동안 의사, 간호사들이 몇 번씩 들락날락 거리며 내진을 했다. 아직 덜 열렸다고 했다. 무통주사를 맞으려면 조금 더 자궁문이 열려야 된다고 했다. 난 너무 아팠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이제는 정말 때가 됐지 싶어 의료진을 불렀다.
의료진 세 명이 줄줄이 들어온다. 아까 몇 번을 했듯이 위생장갑을 끼더니 나의 자궁 입구를 헤집는다. 단발머리 의사의 건조하지만 약간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아까 얼마 열렸었다고 했지?"
단발머리 의사는 자궁문이 다 열렸다고 했다. 분만실로 바로 옮기라는 지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 그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무통주사는요?"
"안 맞아요. 바로 분만합니다."
내 인생에 이렇게 억울한 적이 있었던가? 무통주사를 맞으면 된다는 일념으로 5시간을 참았는데, 이대로 더 참아야 하다니, 이제는 힘까지 줘야 하다니.
분만장에서는 1시간 반 동안 있었다. 힘주는 동안은 아픔이 그나마 덜했다. 하지만 나의 힘주기는 참으로 미약했다. 6개월 동안 요가를 다니며 연습한 힘주기 연습과 호흡법은 뭐였단 말인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분만장에서는 내 옆에 있는 간호사 선생님이 신과 같았다. 내 배를 눌러주고, 자궁문을 손으로 열어주는 간호사의 지시대로 난 기계적으로 숨을 내뱉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힘을 주었다.
분만실에 있는 동안 난 끊임없이 나를 의심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어 졌다. 난 한다고 열심히 하는데 내 힘주기는 옆에 있는 간호사 선생님 성에는 안 차는 모양이었다. 간호사는 계속 나를 닦달했다. "힘을 더 줘야 돼요. 이번에는 좀 더 길게 힘을 줘 보는 거야."
'내가 힘주기를 그만두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럼 아이가 못 나오는 걸까. 설마 수술이라도 해서 아이는 살려주겠지...'
결국 아기는 내 회음부를 찢고 나왔다.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모습으로 엄청난 울음소리와 함께-
드라마 같은 데서 본 적 있다. 아기를 낳은 직후, 아이를 안고 감격에 찬 눈물을 흘리는 산모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건 결단코 거짓이다. 말도 안 된다. 난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때 내 속마음은 이랬다.
'저 큰 게 내 속에서 나왔단 말이야?'
몸무게가 꽤 나가서인지 굉장히 길어 보였던 아기가 내 속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간호사가 내 옆에 아기를 데려다주었는데 느낀 감정은 '여기서 안 죽어 다행이다.'와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정도였던 거 같다. 그때 내가 눈물을 조금 흘렸다면, 그건 감동의 눈물이 아니라 너무 힘들어서 흘린 눈물이었을 거다. 아이를 사랑하게 된 건 며칠이 흘러서다. 솔직히 말해 출산의 순간 내 아기에 대한 애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내 속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아이의 얼굴에서 나를 읽기도 어려웠다. 그저 내 몸의 아픔이 먼저였다.
지금에 와서 누군가 예비엄마인 사람이 나에게 출산의 고통에 묻는다면 어떻게 말해줄까? 다른 많은 친구들이 그랬듯 나는 '아프다' 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아픔의 정도를 표현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만약에 제때 무통주사를 맞았다면 어땠을까? 조금 덜 아팠을지도 모른다. 다행인 건 그 고통은 끝이 있다는 것이다. 이틀 내내 분만장에서 진통한 산모의 이야기도 들어보았지만, 어쨌든 산고의 고통엔 끝이 있었다.
나는 겨우 5시간 진통을 하고 1시간 반 동안 분만실에 있었을 뿐인데도, 그 후유증은 상당했다. 나는 그야말로 풍선처럼 부풀었다. 도저히 내 얼굴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얼굴과 팔다리 온몸이 부어있었고, 그 붓기가 몸에서 다 빠져나가기까지 한 달여가 걸렸다. 사람이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부을까. 출산은 내 예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다시 그 고통을 경험할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1년 반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상당해서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 기억이 희미해질까. 다른 많은 이들이 몇 년 지나면 둘째를 생각하듯이 말이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출산의 고통을 겪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