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신이 Feb 08. 2019

백일상 다음엔 안 차리렵니다  

백일상 두 번 차렸다간 

100일이 다가온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두 달쯤 되자 통잠을 자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자 뒤집기를 했다. 심지어 혼자 잠들 때도 있었다. 얼굴을 바닥에 묻고 비비고 몸부림치며 울다가 어느 순간 보면 잠들어있곤 했던 것이다. 백일의 기적이라고 했던가. 정말이었다. 80일을 넘어서니, 아기 보기가 한결 수월해진 느낌이었다. 아이가 통잠을 자기 시작하고 잠들면서 우는 일이 적어지면서, 나의 삶의 질도 크게 향상되었다. 아이가 잠자다 깨지 않으니 말 그대로 살맛이 났다.


남편과의 사이도 해빙기에 접어들었다. 이제 아이가 잠들고 나면 남편과 같이, 혹은 혼자서 맥주를 한 잔씩 할 여유도 생겼다. 모유수유를 일찍 끝낸 건 아쉬웠지만, 이제 매운 떡볶이, 기름진 음식, 커피와 맥주를 다시 입에 댈 수 있어 행복했다. 나는 잊고 있었던 행복을 입에 넣고 마구마구 씹어댔다.


아기가 낮잠을 잘 때는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했다. 다른 이맘때 아기들은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다. 조리원 동기 엄마들 카톡방에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엄마들이 육아정보를 주고받는 어플을 깔아 두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봤다. 바야흐로 댕이의 100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색하다 보니 백일상 차리는 건 필수 이벤트로 보였다. SNS 속 사진들에선 예쁜 꽃과 케이크로 장식된 상 위에 아기가 웨딩드레스 못잖은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었다. 아, 너무 사랑스럽잖아. 매일 후줄근한 내복 떼기만 입고 뒤집기에 몰두하고 있는 댕이를 보니, 댕이에게도 그런 예쁜 레이스 드레스를 꼭 입혀주고 싶었다.


백일상을 대여하게 된 건 순전히 아기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히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결혼할 때만 해도 불필요한 건 하지 말자는 주의였는데, 그래서 스튜디오 사진도 생략했건만, 정작 나중엔 찍을 걸 후회했던 경험이 있었다. 스튜디오 사진을 안 찍으니 청첩장에 넣을 사진도 없었고 결혼식장에 띄울 사진도 없어 아쉬웠었다. 댕이의 백일에는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백일에 예쁘게 사진을 찍어주리라. 


수일을 검색해보니 요란스럽지 않으면서 전통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백일상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는 아기 드레스가 심플하면서도 우아해 보였다. 결코 저렴하다 할 수 없는 가격이었지만, 눈 딱 감고 이체했다. 백일잔치를 다 끝낸 느낌이었다. 보내주는 상차림 그대로 해서 과일이랑 떡만 사다가 올리면 되는데 뭐가 어렵겠나. 난 이왕 백일상을 빌렸으니 뽕을 뽑아버릴 작정이었다. 시부모님이 멀리 오시기 불편하실 것 같아 가까운 데 사시는 친정 부모님 모시고 집에서 한 번, 시댁에 상을 가져가서 또 한 번 차리기로 했다. 


백일상을 두 번 차리다 


백일상이 도착했다. 소품 하나하나가 꼼꼼히 뽁뽁이로 싸여있다. 안내장에는 다시 그대로 포장해서 보내달라는 당부가 쓰여 있었다. 혹시 파손이 될 경우 배상해야 한다는 문구도. 당연한 거지만 조금 부담스러웠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 그릇들도 있었다. 수십 개의 소품들을 하나씩 푸는 것도 일인데 이걸 다시 그대로 싸야 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집에서 한 다음에는 포장해서 어머님 댁에도 가야 되지 않나. 거기서 또 이걸 풀었다가 다시 포장해야 한단 말이지. 오다가다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백일 이틀 전, 1차 백일상을 집에서 차렸다. 안내서에 쓰인 대로 상 위에 소품들을 늘어놓았다. 아침에 떡집에서 찾아온 떡을 높다랗게 쌓았고, 사과, 오렌지, 멜론, 파인애플 등 크고 싱싱한 과일들을 바구니 위에 얹었다. 분홍색 크림으로 '100'이라고 쓴 케이크를 중앙에 올려놓았다. 이제 아기가 상 위에 올라갈 차례였다. 예쁜 레이스 드레스를 입힌 댕이를 아기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댕이까지 올라온 백일상은 만족스러울 만큼 예뻤다. 하지만 댕이는 좀 불편해 보였다. 아직 아기 의자에 앉는 게 익숙지 않아,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댕이가 울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 남편과 나는 서둘러 움직였다. 




"자, 할머니 할아버지 먼저 들어가시고요~" 


남편의 진행에 따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댕이 뒤에 섰다. 그다음엔 7살, 5살 댕이 사촌 오빠들, 댕이 이모 이모부, 마지막으로 나와 남편까지 줄줄이 백일상 뒤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역시 남는 건 사진뿐이다. 댕이는 다행히 울지 않았지만, 이 자리를 귀찮아하는 듯 보였다. 집중하지 않는 아기의 주의를 끌기 위해 우리는 탬버린을 울려댔다. 댕이 아빠가 이 각도 저 각도로 사진을 찍는 동안, 댕이는 눈물을 흘리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30분간의 포토타임이 끝이 났다. 이제 백일상을 정리할 차례다. 그냥 놔두면 애들 발에 걸려 깨질지도 몰랐다. 상자에 그대로 넣어 내일 시댁에 가져가야 한다. 한 곳에 두었던 뽁뽁이를 꺼내어 하나씩 쌌다. 어떤 순서로 넣어 왔는지 기억을 더듬어가며 상자 안에 넣었다. 


다음 날 시댁에서 2차 백일상을 차렸다. 남편이 그 무거운 상자를 차에서 내려 빌라 3층까지 올렸다. 같은 순서대로 기계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대여 백일상 상자를 풀고 싸기를 반복하니 댕이의 백일이 지나가 있었다. 



아기의 100일, 엄마의 100일 


두 번의 백일잔치를 치르는 동안 댕이는 울지 않았고, 대여 백일상의 소품들도 모두 무사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 생겼다. 다음 날, 온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심한 몸살이 온 모양이었다. 집에 있는 약을 먹어봤지만 몸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병원에서 링거를 맞았다. 


댕이가 백일이면 내가 출산한지도 백일이다. 아직 산후조리 기간이었다. 노산이라 산후조리 기간을 6개월 이상으로 잡아야 한다던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경고가 떠올랐다. 아이가 밤잠을 잘 자게 되니 내 몸이 자유로워지고 가뿐하다고 생각해서 무리해서 움직인 게 화근이었다. 


백일상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아기가 백일을 무사히 보냈고, 엄마 역시 출산 후 힘든 백일을 지낸 것을 축하하는 자리. 아기와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건 유난스러운 백일상이 아니었을 거다. 케이크 하나 사다가 촛불 켜고 후 불면 그만이었을 것을... 처음이라 아기에게 빠뜨린 거 없이 남들처럼 잘해주고 싶다는 욕심에 몸만 축나버렸다.  난 일주일 이상을 앓았고 그동안 아기를 잘 안아주지도 못했다. 정작 중요한 걸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