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클루니 라 소르본느' 역의 토마토 파니니
늦잠을 자는 일은, 살면서 셀 수 없이 많지만, 그것이 여행지에서의 일이라면 그 속상함은 유난하다.
간밤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마신 와인이 과했던 거다. 일어나 보니 벌써 해가 노릇노릇하다. 진짜 안주도 좀 먹을 걸 그랬다. 서로 여행담만 안주 삼아서 이런 사달이 났다. 그날 그날의 여행 일정을 꼼꼼하게 짜 놓은 나는, 이 변수에 당황하고 말았다. 어떻게 모은 돈으로 큰맘 먹고 온 여행인데 이렇게 한나절을 버리다니. 그런데 이상하다.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기분이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9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12시에 일어난 기분이랄까.
부장님 점심 먹고 갈게요. 에라, 될 대로 돼라.
이런저런 계획들은 이미 실행 불가능! 그냥, 슬렁슬렁 팡테옹에 가기로 했다. 간밤에 함께 와인을 마신 몇 명이 팡테옹과 소르본느 대학 쪽에 가고 싶다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던 거다. 나도 즉흥적으로 합류했다. 나는 팡테옹보다도, 클루니 라 소르본느 지하철 역 근처에서 파는 파니니가 먹고 싶었다. 토마토랑 모차렐라 치즈만 듬뿍 들어간 파니니! 파니니를 먹으며 팡테옹까지 걸어 보자. 그 날의 일정은 그렇게 해방되었다.
사실 나는, 세련되게 유럽여행을 몇 달이나 떠날 처지가 아니었다. 학비를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했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나라도 더 해서 집안 형편에까지 보탬이 되어야 했다. 어디 내놔도 부족한 나의 스펙을 하나라도 더 쌓아야 했고, 나의 꿈을 위해서 한 장이라도 더 끄적거려야 했다. 서울에서의 날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모자라기만 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파리에 오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어느 날 훌쩍 한국을 떠났던 그는 파리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같이 스텝으로 일하던 형이 한국으로 들어가게 돼서 말이야. 요즘 바쁠 때라 손이 모자라서 걱정이네. 여기 와서 손님들 밥 좀 해주면 안 되겠냐? 먹여주고 재워줄게. 여기 방 많다!"
그 말은, 서울에서의 반복되는 날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날들을 해방시켰다.
'지금과 다를 수 있다고? 내가 여기 있지 않아도 된다고?'
그 사실 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에펠탑과 마카롱, 오르셰 미술관은 나중이었다.
당장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저렴한 비행기 티켓과 유레일패스를 구매하고, 소소한 액수의 현금을 모으고, 아르바이트 세 개를 모두 관뒀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클루니 라 소르본느 역의 파니니는 날 파리로 불러준 그가 알려주었다. 맥도널드 앞 쪽에 위치한 그 작은 집에서는 저렴하면서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크고 맛있는 파니니를 먹을 수 있다. 처음 한 입 먹었을 때, 토마토와 치즈만으로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데에 깜짝 놀랐다. 익힌 토마토는 이런 맛이구나. 마치 토마토를 처음 먹어본 것만 같았다.
말랑한 치즈가 죽죽 늘어지는 뜨끈뜨끈한 파니니를 손에 쥐고 먹으며 소르본느 대학가를 어슬렁거렸다. 여러 번 와 본 길인데, 이렇게 다저녁때 오기는 처음이었다. 팡테옹까지 올라가는 언덕진 길에서 내다보는 파리는 엄청난 색깔에 덮여있었다. 지는 해가 기염을 토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눈부신 오렌지색이었다가, 투명한 호박 빛깔이 되었다. 파리 시내가 마치 하나의 호박 보석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 풍경에 압도당했다. 아직 덜 깬 와인과 잠 때문에 나른했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싶었다.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서 어슬렁 밖에 나왔을 뿐인데, 나는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서있다. 일행들은 앞서서 사진도 찍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거리를 즐기고 있다. 나는 국물이 떨어지는 파니니를 손에 들고 달콤한 토마토와 부드러운 치즈의 조화를 즐기며 나른한 기분을 즐기고 있다.
아, 될 대로 되어도 좋다. 그냥 지금 이대로 꿈이어도 좋다. 호박 색깔 파리에 휩싸여, 이대로 호박 보석이 되어도 좋겠다. 그러면 나는 토마토 파니니를 먹고 있는 모습의 호박 보석이 되려나. 아무려면 어때,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부족함 없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