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여자

[아노말리사]를 보고

by 두통


어디선가 기분 나쁜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모든 남자의 이상형은 어떤 여자인 줄 알아?

-글쎄. 뭔데?

-처음 보는 여자.


나는 여자라서 남자의 이상형은 잘 모르지만,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를 비하하는 말일 거라고. 나는 그 농담이 불쾌했다. 그런데 이 영화 '아노말리사'는 그 농담이 자꾸 떠오르게 만들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마이클이 살고 있는 세상은 독특하다. 그 자신만 빼고 모든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같은 얼굴이고 목소리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목소리가 그 목소리다. 마이클은 매우 불행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출장지에서 어떤 목소리를 듣게 된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 처음 듣는 목소리다. 마이클은 목욕도 하다 말고 그 목소리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간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꾀꼬리 소리처럼 들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특별해 보인다는 건 알겠다. 나에게도 일어난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당신만 진짜고 나머지는 다 가짜예요는 무섭다. 사랑은 과연 어쩔 수 없는 운명이고, 마법인 걸까. 그리고 하필이면 그 불가항력의 사랑은 원나잇 스탠드 직후 끝날 수밖에 없는 걸까. 마법이 끝나면 그 뿐인 걸까.


blank.gif
ba0d1ebb-51d1-41a7-b7b5-1f7031114a4f.png
blank.gif
d28b167c-ae64-4f1c-9a55-dc55d9fa7eb1.jpg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화 속에서 너무나 기발하게 외로움과 권태를 표현해낸, 같은 '목소리'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 억울할 것 같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그 사람이 다 그 사람인 것이 아니며, 모두 당신한테 사랑을 구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똑같은 목소리, 얼굴인 세상에 어떤 마법 같은 이유로 한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이 엄청나게 특별했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특히 그 대상자가 본인의 특별함을 전혀 모른다면, 나이기 때문에 당신의 특별함과 가치를 알아보았다는 또 다른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저변에 깔려있는 것은 아닐는지.


모두 다른 얼굴이고, 다른 목소리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 사랑을 받지 않더라도, 사랑을 하지 않더라도.


blank.gif
43a01537-ef5a-47ac-9b35-7cafbee509dd.jpg


blank.gif
71f41111-8d2a-46f3-ba9f-9c6b8f79d844.png
blank.gif
74f562e7-dfa4-4305-8872-342fe108708c.jpg
blank.gif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전속력으로 사랑에 빠져버리고 마는 주인공을 보면서, 본인의 눈에 씌인 오만은 알아보지 못하며 낭만적 우울감에 빠져있는 쓸쓸한 사람을 보았다.

그 남자가 안되긴 안됐다.


하지만 나는 리사가 걱정된다. 그 활기 넘치고 매력적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한 그녀가 이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그 후로 수많은 세월 동안 '왜'라는 질문으로 앓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영화에서 리사는 밝은 모습으로 그에게 착한 편지를 쓴 것을 알고 있다. 이놈의 시나리오는 남자 녀석이 썼겠지. 리사, 리사, 완벽한 리사. 순수와 사랑의 여신.


이야기하는 방식을 바꾸었다고, 같은 이야기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미 아닌 잡초 같은 나 같은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불안하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교회에서 듣는 것으로 족하다. 그래, 어쩌면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못나고 당신도 못났다는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하자.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잔 말이다. 멋대로 당신의 마법으로 나를 기대하지 말아주었으면. 그 마법을 핑계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지 말아주었으면. 나는 당신의 사랑의 마법 없이도 충분히 '나'이며 유일한 존재다.


이 영화는 너무나 진짜 같아서 나를 이리도 흥분하게 만든다. 이 모든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니, 감탄이 절로 난다. 그 주저하고 당황하고 자책하는 표정. 어쩜 그리도 그때 그 사람과 닮았는지.

나는 이 영화가 슬프다. 이 영화도 본인이 그런 줄 알고 있기에, 더 슬프고 슬프다.


4b1459a9-c942-4452-aede-e124cbdee32e.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