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에 대한 기록
#한동안 매일 밤 7살 딸아이와 아기공룡 둘리를 열심히 보았다.
같이 넷플이나 왓챠를 열고 이것저것 골라서 보는데 좀처럼 아이도 나도 같이 재밌을만한 만화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는 캐치티니핑이나 시크릿쥬쥬 같이 나로서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만화를 골랐고 매번 실랑이만 하다가 그냥 자자! 하는 날도 많았다.
한참 손가락으로 휘리릭 휘리릭 빠르게 화면을 넘기다 눈에 들어온 둘리!! 분명 안 본다고 하겠지 싶었지만 이거는? 하고 물어보니 웬일로 알겠다는 대답에 적어도 10년 만에 둘리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요즘 나오는 공룡 만화를 평소에도 종종 보던 아이라 아이 입장에서도 백번 양보해서 이루어진 협상이었다.
재생을 누르고 따라라라랑~하고 요리보고에 요! 라는 오프닝이 시작되자마자 뇌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잊고 있던 둘리 주제가가 소환되며 거의 모든 전편 에피소드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나 천재 아니야? 이렇게 다 기억난다고? 할 정도로 주마등처럼 둘리에 대한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래서 어린 시절에 경험들이 평생 간다고 하는 걸까..
#특히 딸은 라면과 구공탄 노래가 나오는 편을 제일 좋아해서 몇 번이나 보고 또 보고 멜론으로 노래를 틀어 달라고 했다.
둘리 재밌어? 하고 물으면 응! 하는 게 신기해서 진짜 제대로 이해하고 보는 게 맞는지 퀴즈를 내기도 했다."코 빨간 애 이름이 뭐야?"
"둘리 사는 집주인 아저씨 이름이 뭐야?"
"마이콜이 노래대회에 나가서 받은 상이 뭐야?"
하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을 해서 신기했다.
그렇게 매일 밤 둘리의 여러 에피소드들을 딸과 함께 봤는데. 커서 다시 보니 새롭게 느껴지는 장면과 대사들이 많았다.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된거라는 말이 있다.어린시절 둘리 속 최고 악당이었던 고길동이 안쓰럽게 느껴지다 못해 보살이 아닌가 싶었다. 고길동이 군식구들을 품느라 썼을 금전적 부분까지 굳이 끼워 넣지 않더라도 엉덩이에 팽이가 꽂히고 청소기에 머리가 밀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고길동을 욕할 순 없지.. 암~그렇고 말고 너희가 으른의 삶을 알아??그렇지만 요즘 만화라면 절대 방송되지 않았을 고길동이 무차별하게 둘리 패거리에 눈탱이를 밤탱이를 만들어 놓은 장면은 아이에게 뭐라 설명하기 애매했다. 문밖에 쫓겨나 달걀로 멍든 눈을 익숙하다는 듯이 문대는 둘리의 모습은 이웃들의 무관심까지 야속하게 느껴졌다. 왜 아무도 신고를 안 해??!
#아 그땐 그랬지
둘리가 재밌는 건 단순히 스토리 때문 만은 아니었다.
라떼는 말이야..집 앞에 연탄을 버리는 쓰레기통이 있었어~ 종량제 봉투가 없던 시절이라구~~
라떼는 말이야~ 아빠가 방 안에서 이만~~~한 재떨이에 담배를 폈다구~~
같은 회상에 젖게 했다. 응팔을 보는 비슷한 기분이랄까 고길동의 단독주택의 인테리어며 고길동이 모으는 레코드판 낚싯대 티비 괘종시계 등등 레트로한 갬성이 가득했다.
지금은 둘리에 대한 마음이 시들해져서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최근에 둘리가 더 이상 재미없다는 딸아이 말이 괜스레 서운해서 재밌게 볼 땐 언제고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한마디 했더니
“둘리 안아보고 싶어”라는 딸에게 비웃으며
“너 설마 둘리가 진짜 있다고 믿어??하하하하하”
“있어!!!”
“ㅎㅎㅎㅎ어디???어디있는데~”
“쌈문돈(쌍문동)에 가면 있어!!!!”
라는 대답에 흠칫했다.
지금은 식었지만 그래도 한때 최선을 다해 고길동의 거주지까지 외우며 열심히 봐주어 고마워.
둘리가 다시 나오면 좋겠다~ 이왕이면 형광 연둣빛 둘리 말고 첫 시즌의 짙~은 녹색 둘리로!
그림은 딸이랑 같이 그려본 둘리와 꼴뚜기 왕자-
그리고 둘리 얼굴에 동그라미는 코가 아니라 뿔이라는 t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