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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Jul 11. 2023

욕심내지 마!

어느 가을날, 아기 고라니가 겅중겅중 뛰어 산을 내려왔어요. 그리고 호두나무가 늘어선 제각을 지났어요. 발길에 동글동글한 둥근 호두와 끝이 뾰족한 납작 호두가 밟혔어요. 제각 아래로 보이는 개울가에  쑥부쟁이 하얀 꽃이  손짓을 했어요. 여뀌도, 고마리꽃도  아기 고라니를 아는 체했어요. 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오늘은 그저 오랫동안 집 밖을 나오지 못한 채 지내야 했던 답답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달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시 피아골 언덕으로 올랐어요. 그곳은 아기고라니가 사람들 모습이 궁금할 때면 나무사이에 몸을 숨기고 서 있던 곳이었어요. 가을 햇볕이 언덕 위에 사르르 내려앉아 눈이 부셨어요. 아기 고라니는 실눈을 뜨고 마을을 내려다보았어요.

“어, 저게 뭐지?”

 언덕 바로 아래부터 시작된 올망졸망한 밭에는 알록달록하고  기다란 천 조각들이 빙 둘러져 있었어요.

“어라! 한 군데만 그런 것이 아니네. 저기도? 그 옆에도? 그 아래에도?”

밭 모양이 동그라면 동그랗게, 네모면 네모나게, 세모면 세모지게 넓적한 천으로 빙 둘러져 있었어요. 아기 고라니는 가까이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보고 싶었지만 잠시 멈췄어요.


야생동물을 막고자  빙 둘러놓은 폐현수막

‘아가야,  인간들이 사는 곳을 함부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 저기 마을 사람들이 사는 곳이 따로 있듯이 우리도 다닐 수 있는 곳이 따로 있단다. 알았지?  난 너를 아빠처럼 잃고 싶진 않구나.’

아기 고라니는 엄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어요. 그렇다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알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 아기 고라니는 뒤돌아서서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어요. 다시 피아골을 올라 제각을 지나고  큰 골로 들어갔어요.


“엄마, 엄마!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에 도착한 아기고라니는 엄마와 할아버지를 급하게 불렀어요.

“에구 녀석아, 천천히 다니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렇게 야단이니?”

헐레벌떡 달리던 아기 고라니는 바로 엄마 앞에서  멈추었어요. 헉헉 숨을 몰아 쉬었어요

엄마,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저 건너 밭에 빙 둘러글자조각들은 다 뭐예요?”

엄마 고라니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어요.

“녀석, 웬 야단법석인가 했더니... 벌써 저 건너 피아골까지 다녀온 거야?”

집으로 들어오던 할아버지가 아기 고라니의 큰 목소리를 듣고 말했어요.

“그러게요, 아버님! 이제 감기가 나은 듯해 집 밖으로 나가도 좋다고 허락을 했더니 그곳까지 다녀온 모양이네요.”

할아버지 고라니는 메고 있던 망태기를 내려놓으셨어요.  망태기 안에는 윤기가 자르르한 알밤이 조금 들어 있었어요.

“아버님, 토골에도 알밤이 별로 없었나 보네요?”

“그렇구나... 피아골에만 그런 줄 알았더니 온 산이 다 그렇구나...”

“아이참! 할아버지, 엄마! 제 말에 대답 좀 해주세요! 그리고 뭐가 그렇다는 거죠? 도대체 제가 감기로 아픈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

아기 고라니는 할아버지와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았어요.

“아이고 녀석, 이렇게 궁금한 것이 많은 것 보니 정말 감기가 다 나은 모양이구나!”

“그러게요. 아버님.”

“아가야, 너도 알고 있지? 우리가 가을이면 도토리, 밤, 상수리 열매들을 주워다 모아놓고 일 년 양식을 먹는다는 것을 말이야.”

“네. 그럼요. 할아버지”

아기 고라니는 할아버지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대답했어요.

“그런데 말이다. 언제부턴가 모든 열매들이 점점 구하기 힘들어지는구나.”

그때 이웃에 살고 있는 멧돼지 아저씨가 쿵쿵 거리며 걸어 들어왔어요.

“아니 자네가 웬일인가? 그리고 입가에 묻은 것은?”

할아버지가 아저씨 입가에 묻은 흙을 보며 묻자 아저씨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입 주변을 쓰윽 닦으며 말했어요.

“헤헤, 이거요? 별거 아니에요. 요즘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찾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게다가 제가 고구마 좀 먹겠다는데 사람들이 밭에 울긋불긋한 글자를 걸어놓는 바람에 그 냄새에 정신이 사나워서 이렇게 주둥이만 버렸다니까요!”

아기 고라니는 피아골 언덕 아래로 보이는 밭에서 기다랗고 넓적한 천에 뭔가 여러 가지 색깔로 적혀 있던 것을 다시 떠올렸어요.

"맞아요, 멧돼지 아저씨! 저도 봤어요. 아저씨가 고구마 훔쳐 먹을까 봐 사람들이 그렇게 해놓은 것이었어요?”

“그렇다는구나. 아가야. 그런데 난 좀 억울해! 산에 먹을 것만 많았어봐 내가 거기까지 내려가진 않았지!”

멧돼지 아저씨는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로 말했어요.

“아 참, 나 좀 봐. 오늘 저녁 보름달이 연못에 빠지는 시각에 제각에서 회의가 열린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려 왔는데 딴 소리만 하고 있네요.”

멧돼지 아저씨는 이제야 생각이 난다는 듯 말했어요.

“응. 알고 있지. 원래 보름날 저녁에는 회의가 있는 날 아닌가?”
 “아니요, 오늘은 긴급회의래요! 산에는 먹을거리가 줄고 인간들은 자기 것을 뺏길 수 없다고 말뚝을 박고 글자를 걸어놓으니 대책을 찾아보자는 것이겠죠.”

“그래야지, 그래야지...”

“할아버지 좀 있다 뵐게요. 아주머니도요. 아가야 너도 잘 있거라!”

멧돼지 아저씨는 뒤돌아서 다시 쿵쿵거리며 갔어요.

“아버님, 오늘은 우리 아가도 데리고 갈까요?”

엄마가 말했어요.

“응. 그러려무나. 이제 제법 자라서 회의에 참석해도 될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기 고라니는 처음으로 제각 회의에 참석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어요. 곧 어른이 될 것 같았어요.


어두운 밤이 되었어요. 할아버지는 보름달이 연못에 빠질 시간이 되었다며 아기고라니를 데리고 엄마와 함께 을 나섰어요. 낮에는 큰 골을 지나 제각을 지나 피아골로 내려가는 일이 쉬운 일이었지만 깜깜한 밤에 길을 나서는 것은 처음이어서 아기고라니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쫑긋거리며 걸었어요.

 제각을 올려다보니 두 개의 층으로 나누어진 높은 계단 위에 나무 대문이 보였어요. 보름달 덕분에 커다란 호두나무도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아기 고라니를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가야, 나를 따라오렴.”

엄마는 할아버지를 따라서 계단이 아닌 풀숲을 통해 올라가 허물어진 담장 사이로 들어갔어요. 아기고라니는 발 밑에 둥글둥글 동글 호두가 밟히고 뾰족뾰족 납작 호두가 밟혀도 참고 엄마를 따라 가느라 힘들었어요.


“산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가방을 메고 와서 도토리를 가득 채워가지고 가버려요! 그리고 산소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모두 모두 가방을 메고 와서 상수리도 산 밤도 싹 쓸어가 버리니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게 남아있냐고요!”

회의가 벌써 시작되었나 봐요. 빨간 눈의 산토끼 형이 큰 소리로 말했어요  

“맞아요. 사람들하고 같이 사는 고양이들이 그러는데 상수리 하고 도토리는 묵을 쑤어 먹고요, 산 밤은 사람들이 심어서 따먹는 밤보다 더 달다고 가져간대요! 그래서 우리들 음식이 줄었어요!”

다람쥐 가족들도, 오소리 가족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했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들 밭에 들어가서 고구마를 훔칠 수밖에 없었다고요. 아니죠, 제가 훔친 것이 아니고 그냥 가져온 것이라고요! 사람들도 우리 산에 들어와서 다 가져가니 나도 사람들 밭에 가서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가져온 것뿐이라고요!”

멧돼지 아저씨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유, 우리 딸 오소리는 그 인간들이 쳐 놓은 글자 천막이 울긋불긋 화려해서 새로운 놀이터가 생겼다고 그 고구마 밭에서 놀다 왔다지 뭐예요. 그러다 인간들한테 잡히면 큰일인데 말이에요.”

오소리 아줌마는 옆에 앉아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딸을 향해 꿀밤을 주며 말했어요.  

“아야, 엄마! 그래서 제가 그 글자 천막을 찢어 왔어요! 여기 보세요!”

아기 오소리는 꿀밤 맞은 머리를 문지르다가 뒤에 숨겨두었던 천막을 냉큼 들어 보였어요.

“그리고 좋은 생각이 있어요. 우리도 산에 이 글자 천막을 치면 되잖아요? 아무도 우리 것을 맘대로 가져가지 못하게요!”

아기 오소리의 엉뚱한 제안에 다람쥐, 토끼, 고라니 가족들이 모두 웅성거렸어요.

“어떻게?”

여기저기서 좋은 생각이다! 아니다! 방법이 뭐냐? 시끄러워졌어요.


뾰족한 수를 찾느라 모두들 시끄러운 사이, 아기고라니는 살금살금 걸어서 제각 안을 둘러보기로 했어요. 사람들이 저 아래쪽에 새로운 제각을 지으면서 이곳은 아무도 살지 않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가끔 오래된 건물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어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기 고라니가 제각에 깊숙이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어요.

회의가 열리고 있는 왼쪽 마당을 빠져나오니 오른쪽 끝에 있는 연못이 아기 고라니 눈에 들어왔어요. 살랑살랑 연못가를 걷다가 아기고라니는 연못을 들여다보았어요. 보름달이 연못 속에 풍덩 들어가 있었어요.  보름달에 비춘 아기고라니의 놀란 표정이 반짝거렸어요. 그 뒤로 커다란 살구나무 검은 그림자가 늘어뜨리고 있었어요. 바로 그때 살구나무 가지가 휘청 흔들렸어요. 아기고라니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어요.

“누... 누구세요?”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불빛 같은 눈 만 보이던 그것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어요.

“오홍, 아가야! 놀라지 말아라. 난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는 고양이란다.”

“아... 안녕하세요?”

아기 고라니는 언젠가 엄마로부터 제각에 살고 있는 고양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많이 놀라지 않았어요.

“넌 왜 회의에 함께 하지 않고 나왔어? 뭔가 문제가 많은가 보던데...”

“네... 그런데 좋은 방법이 없나 봐요. 오소리는 사람들과 똑같이 글자 천막을 쳐서 우리들 산에 못 들어오게 하자는데  이 큰 산을 빙 둘러 천막을 친다는 것도 어렵고 글자도 읽을 수 없고요...”

아기 고라니는 회의에서 들은 대로 고양이에게 말했어요.

“오홍, 나도 다 들었지. 어쩌면 내가 좋은 생각이 날 것도 같은데... ”

“어떻게요?”

“나는 사람들과 친하단다. 그래서 나에게 먹이를 주시는 할머니가 글자를 배울 때 옆에서 나도 좀 배웠지.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정말요? 글자를 읽을 수 있어요?”

아기 고라니는 고양이가 대단해 보였어요.

“자, 이제 우리도 저기 회의장 속으로 들어가 볼까? 아가야.”

아기 고라니는 고양이 뒤를 따라 회의장으로 갔어요.  

   

다음 날이었어요.

큰골로 들어가는 입구, 상수리나무 가지에 뭔가 펄럭거렸어요.

가까이 가보니 울긋불긋한 인간들의  현수막  뒷면에 황토 빛 삐뚤빼뚤글씨가 새겨져 있었어요. 이렇게요.

'욕심내지 마! 그러면 우리도 욕심안 부려! 주인’

현수막 아래쪽에는  고라니, 토끼, 멧돼지, 오소리, 다람쥐 발자국이  찍혀있었어요. 아 참, 맨 끝에  고양이  발자국도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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