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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Jul 29. 2023

 꽈리, 아니 풍선덩굴

글쓰기, 그 시작점을 찾아서

 백반집을 나섰다. 문을 열고  한발  내딛기가 바쁘게 여름이 덮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고픔을 부여잡고 걸어오던 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배부르고 볼 일이다. 식당 앞에 놓인 블루베리 화분에 바랭이가 나뭇가지 틈으로 가늘게 햇볕을 찾아 버둥거렸다. 참다래나무 덩굴을 이층 옥상 위까지 끌어올린 붉은 벽돌 집도 한번 더  올려다봐진다. 이층 창문 위로 타래타래 달린 열매를 '어떻게 수확할까?' 괜한 걱정도 해본다. 폭우가 훑고 지나간 후 찾아온 무더위에 더욱 치열하게 살아 움직이는 나무들이  쨍하다.


'꽈르륵 꽈륵', 꽈리였다.

참다래나무가 있는 2층집을 지나 왼쪽으로 꺾으니 오른쪽 사무실 화단에 연둣빛 주머니가 보인다. 까슬거린 연둣빛 주머니에  엄지와 검지손가락이 저절로  닿았다. 힘을 주려다  멈췄다. 노란 연둣빛 공기가 만져진다.  만지는 순간 '푸싯'하는 소리와 함께 머금은 공기가 터져나올것만 같다. 손이 닿는 순간 식물의 역사를 읽어내는 것처럼, 봉숭아 씨앗 주머니가 비틀리면서  갈색 씨앗이 날아가는 그 순간도 만져진 듯했다. 심술궂은  아이처럼  손가락으로 터트리고 싶은 연둣빛 주머니를 두고  저 안에 붉은 꽈리가 들어있는 것 아니냐고, 고무꽈리를 입에 넣고 불어본적이 있느냐는 둥, 옆지기와 부른 배를 만져가며 농지거리를 건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꽈리가 아니었다. 꽈리와 비슷하지만 주머니의 탄력이 좀 파리해 보이고 이파리 모양이 다른듯해 찾아보니 꽈리 아닌 풍선덩굴이었다.

하지만 꽈리였든 풍선덩굴이었든 이미 나는 꽈리를 불던 그때로 가고 있었다. 가는 길목,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계절 냄새가 났다. 그렇게 시작한 냄새는 논두렁 아래 바람을 피해 쑥과 숙지를 캐던 봄으로, 다슬기를 잡던 냇가의 물 비린내로, 교실 뒤 비탈진 산자락 유리창 한 장 한 장 액자처럼 흔들리던 코스모스, 초여름 하얗게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보리대 타는 냄새로, 겨울날 코끝 시리던 바람 냄새로 옮겨갔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에서 멈췄다.  


정말, 오랜만이야. 40여 년 만에 날 찾아오다니... 기억해? 물론 기억하겠지. 넌 여전히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던 버릇은 가지고 있을 테니까.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난 무엇을 말해줘야 하지?  아,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그래 그때였어. 글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본 것이.  그 시작을 기억하고 있어? 


6학년 초,   담임선생님은  '건강상의 이유'로 학교를 떠났다. 어느 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는 선생님이 궁금해서 묻는 우리들에게 옆반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었다. 아이들과 미나리즙을 만들어서 소주병 됫병 가득 담아  드렸지만 막손으로 선생님의 아픈 간을 고칠 수는 없었다. 그 뒤 부리부리한  눈에  입술이  검푸르고  키가 크셨던  첫 담임선생님 대신 작은 눈이 초롱초롱하고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패이는 여자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은 엄마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엄마와  비슷한  느낌도  들었다. 어쩌다 앨범 속 엄마 사진을 보면 어릴 적 내가  생각했던 나이보다 엄마는 훨씬 어린 나이였던 걸로 보아 선생님도 더 젊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숫기 없는 아이였다. 4학년때까지  선생님이  책을  읽으라고  시키면  엎드려 일어나지 않고  버텼다. 수줍음과 고집이라는 의외의 조합은  내 안에서  짝을 먹었다. 5학년을 지나며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부끄러움 많고 똥고집쟁이 촌뜨기였다. 게다가 나는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약국집  딸도  아니었고, 늘 일등을 놓치지 않는 엄마가 선생님인 아이도 아니었고,  아버지가  주유소 주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학기 초 가정환경조사서 경제적 생활정도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 '중'에 동그라미를 쳤다. 우리 반 아이들 절반 이상이 똑같이 그랬다.


우리 학교는 음악연구학교였고, 양궁선수를 키우고 있었다. 시골학교 치고는 장학사라 말하는 분들이 오는 음악발표회가 잦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내게 그만큼 복도와 교실에 양초를 칠하고 엄마가 만들어준 걸레를 밀어 반짝반짝 윤을 내는 날과 화단에 샐비어나 백일홍 메리골드를 심는 시간이 많음을 의미했다.

선생님을 엄마로 둔 아이는 방송국 노래자랑도 나갔고, 이쁘고 공부도 잘하던 어떤 아이는 자기가 만든 노래를 가지고 상을 받아왔다. 그리고 얼굴도 하얗고 선생님에게 이쁨을 받던 아이들은 궁도부가 되어 내가 화단에 꽃을 심고 복도에서 엉덩이를 들고 걸레를 밀며 달릴 때 활시위를 당겼다. 하얀 가슴보호대와 활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저 부러워만 했을 일이었다. 그런데 양궁부 선생님이 따로 몇 명을 불러 테스트를 했던 것이  문제였다. 불려 간 학생 중 한 명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지시대로 양팔을 쭉 뻗어 보였다. 내 팔을 잡고 살펴보던 선생님의 표정은 '혹시 나도 궁도부?'라는 환상을 잠시 주었다. 그러나 교실로 가보라고 한 후 선생님은  다시 부르지 않았다. 모든 게 그저 그런 아이였던 열세 살의 나는 교실 뒤쪽 게시판에 내가 만든 노래가 걸리기를 바랐다. 궁도부에 들어가 피티체조도 해보고 싶었다. 적어도 한 번쯤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작은 일이 담임선생님이 바뀐 후 시작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청소시간이면 나는 선생님 심부름으로 농협에 갔다. 아이들이 하기 싫은 청소에 열을 올릴 때 나는 선생님이 챙겨주신 동전과  통장을 들고 오일시장 안에 있는 농협까지 15분 정도 걸었다. 다녀오면 청소가 끝나있었다. 땀을 흘리며 걸어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심부름 첫날 선생님은 창구에서 근무하는 언니에게 앞으로 심부름을 보낼 테니  모르면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후  그 언니는 내가 농협에 들어가면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선생님이 의도한 바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용돈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살던 내게 저축이나 경제관념을 가르치려는 목적은 아니었던듯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사회성을 길러주고자 세상 속에  일부러  등 떠밀어  내보낸 게 아닐까 싶다.  옆자리 짝꿍이 '선생님이 너 예뻐하나 봐!'라며 부러워했다. 열세 살 아이는 그저 어깨를 조금 으쓱거릴 뿐이었다.


여름이었다. 수업 중 원고지 쓰기와 글쓰기를 배운 날, 자유롭게 글을 써서 제출을 했다. 그때 붉은 원고지 속 삐뚤뻬둘한 글씨 속에서 어떻게 내 글쓰기 꼬투리를 발견했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내게  따로  원고지 쓰는 법을 더 알려 주셨고 글쓰기 책도 한 권 주셨다. 그 뒤 어쩌다 보니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상을 받게 되었고, 나는 부상으로 온 '賞'이라고 쓰인 띠지가 둘러진 공책묶음을  책상 위에 보란 듯이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적벽문화제에서 상과  깃발을 들고 학교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뒷모습에 표정이 더 잘 보인다고 하던가? 선생님에게서 받은 사진  속, 붉은 코르덴 바지에 검은 물방울무늬가 있는 빨간  블라우스 차림으로 구령대 앞에서 상을 받는 아이의 뒷모습, 어깨가 봉긋 올라가 있었다.


결국 솟아난 내 어깨뽕은 6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일을 냈다. 교과서를 다 배우고 책거리 잔치를 하게 되었을 때 선생님은 책거리 사회를 맡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아이들은 모두  '진짜 네가?' 묻듯이 놀라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웃는 아이도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온 학교를 통틀어 제일 잘생기고 말도 잘하는 하얀 얼굴에 '아랑드롱을 닮은 조각미남'이라 불리는 남자아이와 함께 책거리 진행을 맡게 되었다.

나는 밤새 도화지에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미사여구를 찾아 지우고 다시 썼다. 둘둘 말린 도화지 몇 장을 들고 다음날 학교에 갔다. 책상을 모두 교실 앞으로 붙여 놓고 시작된 책거리, 나는 말아 올린 도화지를 펼치고 한 줄 읽고 아랑드롱을 닮은 조각미남에게 그다음을 읽으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몇 줄을 우리는 거의 책을 읽다시피 했다. 하지만 "시작하겠습니다" 이후에는 전혀 쓸모없는 도화지였다. 밤새 머리를 쥐어짜가며 적어온 내 시나리오는 인사말 이후에 써먹을 곳이 없었다. 언제 어떻게 치고 들어올지 모르는 아이들의 장난과 끼어들기에 내가 써온 시나리오는 맥을 못 추고 던져졌다. 다행히 노래와 춤에 재주가 많은 아이들과 선생님이 준비하신 다과로 잘 끝났다.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을 했다.


그 후  내게 글쓰기는 혼자만 보는 일기장에 적힌 글이 전부였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재능 없음을 제대로 알게 된 이후 어디에도 내 글을 내본 적이 없다.  넓은 세상으로 나올수록  내  글쓰기는  점점  하찮아졌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느라 뒤돌아 볼 새 없는 많은 날이 지나고 지났다.

그리고 어느 날, 쉰을 넘어서며 목이 늘어난 스웨터처럼 헐렁한 날이 왔다. 축 늘어진 옷은 주글거리고 보풀이 날렸다. 그때 글을 써보고 싶은 욕심이 다시 일었다. 그 욕심은 난로 위 올려진 물에서 솔솔 올라오는 수증기처럼 늘어진 옷을 촉촉하게 감싸 올올이 긴장하게 만들었다.


 어제와 다른 오늘, 특별한 계획은 첫눈이 내리는 날처럼 나를 설레게 한다. 긴장하게 한다. 글쓰기는 내게 그런 특별한 일상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음에 스스로 안도하게 하는 신경안정제이다.

 그런데 글을 쓴다는 것은, 아니 쓴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은 약간의 설렘에서 출발했지만 점점 긴장을 키우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손을 놓고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몇 번 토해내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긴장과 마침표를 찍고 꺼내놓는 글이 주는 만족감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듯 즐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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