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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Mar 22. 2023

돈은 잡히는 것

앙증맞은 블루베리 하얀 꽃이 이제 막 벙긋거리며 피어나고 있었다. 퇴근길에 어머니를 모시러 시골에 들렀다. 지난겨울에 뿌려놓았던 상추씨가 작은 나비로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상추씨를 얼마나 뿌려놓았는지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했다. 어머니는 쓱쓱 칼로 베어낸 상추 머리채를 잡고 탈탈 털어 시든 잎이나 잡초를 추려냈다. 추운 겨울을 단내 나게 머금은 시금치도 이미 다듬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시장에 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렇게만 작업이 끝났더라면 내가 열을 올리진 않았을 것이다. 쪽파, 상추, 시금치 한 포대씩 비료 포대가 세 개였다. 시금치와 상추는 시골에서 다듬어 왔지만, 뿌리 채 뽑아온 쪽파는 우리 집 거실을 파향기로  가득 채웠다. 기껏 밖에서 일을 마치고, 시골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돌아왔더니  다시 쪽파 다듬기가 눈앞에 놓인 상황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이것 좀 다듬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 거실바닥에 신문을 깔고 앉아 파를 다듬고 계신 어머니를 보고 있다는 것은 저절로 마주 앉아 같은 작업을 해야 한다고 며느리인 내 몸이 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여러 해 겪다 보니 심통이 났다.

"어머니, 다리 아프시다며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 일하셔요?"

"이렇게 갖고 나가시면 얼마나 벌어요?"

"왜야?"

'하루 종일 뙤약볕에 앉아 있어 봐야 고작 이삼만 원 아닌가요?' 하는 말은 꿀꺽 삼켰다.

"요렇게 이삐게 다듬어갖고 나가야 돈이 잽히제! 누가 가만히 있으먼 일원 한 장이라도 준다냐? 요렇게 내 손으로 해갖고 나가야 할머니가 깨끗하게도 해갖고 오셨네 험시롱 사가제. 아이고, 할머니가 깨깟하게도 해왔다고 잘 사간당께! 내 것이 젤 잘 팔려!"

어머니 손은 여전히 파를 다듬으시며 내게 얼굴을 돌리고 웃으셨다. 어머니 표정이 벌써 오지다.


한눈에 보기에도 다리가 불편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걸음걸이로 어머니는 구시장 부근 골목에 은행 문이 열리기 전부터 좌판을 깔고 시장에서 하루를 시작하셨다. 아침 일찍 당신의 막내아들이자 나의 남편은 몇 개의 보따리와 함께 어머니를 그곳까지 모셔다 드렸다. 칠순을 훌쩍 넘기셨지만 시장에 다녀오실 때면 보이던 어머니의  득의양양한 얼굴을 어머니의 자식들은 좋아했다.


 어머니의 시장 노점상은 우리들 퇴근 무렵에야 돌아오시는 걸로 봐서 하루 종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시장 팥죽 가게에서 점심을 드시거나, 그곳에서 만난 시골 아는 분들과 막걸리 한두 잔을 하시고, 돌아오는 길에는 잊지 않고 정육점에 들러 돼지고기 앞다리살 한 근을 사 오시거나, 두부나 우무등을 사 오셨다. 그것은 새콤달콤한 우무냉국으로, 시원한 김칫국으로, 매콤 짭짜름한 고추장볶음으로 저녁상에 올라왔다.


 막내 시누이가 '우리 엄마는 참 귀여워'라고 말하며 내게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때  한집에 함께 살고 있는 며느리인 나는 '무슨?' 하고 약간 뜨악한 얼굴로 시선을 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약간 수줍은 듯이 볼웃음을 지어 보이시던 어머니는 작고 귀여웠다.

 가난한 집 막내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키가 아주 작으셨다. 손도 작았다. 하지만 그 작은 손 끝은 무척 여물었다. 우리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일부러 가느다란 쪽파를 남겨놓았다가 다듬고 씻어 흐트러지지 않은 채  가지런한 파김치를 비벼내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신기했다. 나는 키가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편에 속한다. 손도 크다. 이젠 어머니가 안 계셔서 내 손으로 파김치를 담아 먹는다. 하지만 파와 양념을 버무릴 때마다 어머니 손길이 아쉽다. 맛도 맛이려니와 주변에 양념이 튀어나가지도 않게 김치를 담아내시던 정갈한 솜씨는 나는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어머니는 노점에서 팔 요량으로 다듬어 놓은 푸성귀 보따리를 지을 때면 당신의 작은 손가락에 물을 묻혀 쪽파, 상추, 시금치 위에 그 물기를  뿌렸다. 싱그러운 물방울이 초록빛 푸성귀에 동글동글 맺혀 좀 더 싱싱해 보였다.


 어머니가 돈을 잡기 위해 가랑이 찢어지도록 달려가지 않아도  돈이 스스로 당신에게 걸어올 수 있도록 물건을 때깔도 곱고 참하게 다듬었던 것이었다.


-어느 날 '돈이 잡히다'에 콕 마음이 박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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