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떠올랐다. 푸른 바다 위 솜을 틀어놓은 듯 펼쳐진 구름 사이로 달이 떠올랐다. 오늘은 보름, 백중. 목화솜 사이에 달도 누웠다. 하얀 솜꽃을 타는 달빛아래 덩달아 나도 누워 뒤척거린다. 낮에 본 게들은 잘 있을까? 숲 속에서 우리들 발자국소리에 놀라 젖은 나뭇잎새로, 돌사이로, 땅속으로 달리던 그들의 걸음에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귓가에 보글보글거린다. 칠팔월 보름달이 떠오르면 암컷들은 산란을 위해 바다를 향한 여정에 오른다는데 오늘 밤 그들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춤을 추고 있을까? 몸 털기를 하고 있을까? 온 힘으로 2만여 개의 알을 바다에 보내기 위해 맹렬하게 몸을 흔들고 있을까?
갱년기 아낙은 그들을 핑계로 달을 바라보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잠들지 못하는 건 다 너 때문이야!'
도둑게는 하필 보름 밤에 내 마음을 훔쳐간 모양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달려 도착한 곳은 신시도 자연 휴양림. 직원 주차장을 제외한 곳에 차 한 대 없었다. 휴양림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만난 이는 숲해설사님과 공사 중인 곳에 앉아 쉬고 계시던 분과 입구에서 만난 직원이 전부였다. 10월, 친구들과 숙박을 하기 위한 답사라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사실은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와 '마침 시간도 나서'가 진짜 이유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다로 간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가는 날은 비가 오곤 했다. 지난번은 입구에서 한 발도 들이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왔다. 그날은 폭우로 인해 산사태 위험이 있으니 입장이 불가하다는 관리직원의 만류로 코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오늘은 정기휴일인 화요일도 아니고 비록 비는 오지만 입장가능함을 미리 전화로 확인한 후에 나서는 길이었다. 한 번의 실패로 좀 더 신중함을 얻었다.
한가한 주차를 하고 우산을 쓰고 걸었다. 산과 바다와 하늘과 비가 고요했다. 산책로를 따라 딱 걷기 좋을 만큼의 비와 확 트인 바다. 더위는 어디 가버렸는지 선선한 비와 바람이 걸음걸이도 가볍게 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들른 화장실에서 만난 붉은 발톱게가 그 고요를 깨뜨렸다. 종종종종 쓰레기통 사이로 숨더니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태양전망대에 올랐다 내려와 달맞이공원을 지나 탐방로를 걸으니 붉은 발톱게 천지였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이나 비에 젖은 땅과 함께 보호색을 입어버린 몸통과 다리 때문에. 상아색 집게발과 선홍빛 집게다리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발자국 소리에 묻혀 그들 나름의 아비규환인 발자국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 두었던 시선이 어쩌다 바닥을 향했더니 한 마리가 보였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달려와 숲 속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는 앙증맞은 뒷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게들의 작은 발소리가 숲 속을 꽉 채우고 있음을 알았다. 맹감나무와 도토리나무사이로 바스락 종종종 내달리며 갈색 나뭇잎사이로 붉은 집게발들이 바지런을 떨고 있다. 산책에 나선 우리는 졸지에 침입자가 되었다. 우리가 도둑이었다. 주인장인 그들의 구역에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쓴 채 방문한 침입자, 붉은 발톱게 발자국 소리는 이미 적색경보 사이렌 소리가 된 듯했다.
우리는 '여기도 있네, 저기도 있네!'를 외치며 사진을 찍었다. 어떤 녀석은 나무 위에 올랐다. 산골에서 자란 나는 나무에 오르는 게는 처음이었다. 신기해서 더 가까이 다가가 찍는데 무척이나 빠르다. 사진 몇 장 찍고 나서 모른 척 걸었다. 긴 관심은 상대에게 불편을 줄 수도 있다. 어느새 게들의 긴장도 풀린 듯 다시 고요해졌다. 제 갈길 가는 것이 서로에게 편안함을 준다.
커뮤니티센터에 들러서야 숲해설사님으로부터 게 이름이 '도둑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지와 민물에서 살다가 산란할 때만 바다로 간다는 도둑게는 우리나라에서는 나무에 기어오르는 유일한 게로, 육지에 굴을 파서 생활하기 때문에 식물 뿌리에 산소를 공급하고 유기물 분해를 도와 산림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등딱지에 새겨진 이모티콘 같은 웃는 상을 보니 담장 위에 앉아 도둑질을 하려다 말씨름으로 날 새고 말던 코미디 '달빛소나타' 부부가 떠오른다. 도둑게가 '부엌게'라 불리는 것도, '스마일 크랩(smile crap)'이라고 불리는 것도 뭔가 매끄러운 연결이다. 부뚜막 위까지 기어와 음식찌꺼기나 과일껍데기 등을 훔쳐먹던 부엌게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하고 등딱지의 웃는 상을 보이며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오늘밤, 도둑게는 2만여 개의 알을 바닷물에 털고 있을지 모른다. 점점 좁아지는 터전에서 살아남아 종족번식을 위해 힘차게 알을 바닷속으로 보내고 있으리라.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보름달이 떠오는 날 밤, 생명의 탄생을 위해 정열적인 털기를, 의식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하얀 솜꽃을 타는 달빛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