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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Oct 09. 2023

밤나무집 딸에게  알밤이란 그렇다.

"언니야, 이거  언제 다  줍냐?"

"너네 형부 출근한 날, 혼자  줍다 보면  세 시간 정도?"

"우와, 장난 아니구먼!"

이슬 젖은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소리, 장화신이  미끌리는  소리, 플라스틱 통에 알밤 쌓이는 소리가 밤나무집 딸들의 짤막짤막 오래된 이야기와 한데 섞였다.  

 "언니야, 우리  저기  안산에서 밤 줍던 거  생각나?"

"그럼, 그때  우리 집은 밤나무가 딱 한그루였는데 안산은  얼마나  넓던지  주인이  저쪽에서  줍고  있으면  이쪽에서  주워가도  모를  정도였잖아."

"밤  이삭 주워도  된다고, 동네사람들  아무나  주워가도  된다고 방송하면 우리도 안산에  주우러 갔었잖아. 그런데 우린  그 보다  먼저  이삭을  주우러 간 적도  있었는데 생각나?"

"맞아, 그랬지! 밤서리를  한 것이지?"

"언니야, 입구에 '불법임산물채취금지 주인백'이라는 팻말 박아놓은 주인이  할 얘기는  아니지 않아?"

새벽 6시 반, 집을 나섰다. 형부의 1톤 트럭을 타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올라 바로 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밤나무 밭에 멈췄다. 눈만큼 게으른 것이 없다. 산소 주변뿐만 아니라  봉분 위까지  엉성하게  자란  풀들을 보니 언제 다 끝내나 싶다. 서둘러  동생과  형부는 밤나무밭  위쪽과  아래쪽까지  흩어져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아버지와  얼굴 한번  뵌 적 없는 외증조부 산소  벌초를 시작했다. 아들과 딸도  그 뒤를  따라 깎인 풀을 갈퀴로  긁어낼  준비를 했다. 언니와 나는 알밤을 주웠다. 금세 산을  오르내리며 밤을  줍는 코밑으로  예초기 기름냄새가 훅 들어왔다. 바람을 타고 베인 풀 냄새도 거들었다. 공기 방울에  산자락에  숨어있던  이슬이  엉겨 붙어 얼굴이 촉촉해졌다.


우리 동네는  앞산도 뒷산도  밤나무  천지다. 한때는  백여 가구가  살던  동네인 만큼  너른 터에  자리 잡은  마을 앞으로 왼쪽 깊숙한  큰골에서  시작된  개울이 흐르고, 마을  뒤쪽으로  뒷동산, 샘골, 서당골이 어깨동무를 하고  듬직하게  버티고 있다. 남향으로 앉은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지나면  멀지 않은 곳에 왼쪽으로 피아골과  오른쪽으로 안산이 들어온다. 그 사이로  동네  밖으로  나가는  도로가  나있다.  그리고  안산  오른쪽으로 청석강이  느리게 흐른다.  이 모든  산에  밤나무가 서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오래전 마을 입구 초록색  현황판에는 '00 마을 특산물 밤'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다. 집집마다 겨우 한그루 정도 밭가에 심어진 밤나무로 명절 제사상에 알밤을  올리거나  장날 겨우 몇 되를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에 반해  안산(案山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은 온통 밤나무였다. 안산이 알밤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날도 우리는 안산에서 밤 이삭을 줍는 날이었다. 이장이 안산에 밤을  주어가도 된다고 방송을 했다. 한동네에 살고 있는 안산 주인이 이제 밤을 다 주었다고 나머지 이삭을 주어가도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날은 선생님 가정방문일이었다. 첫날이니 미처  주인이 줍지 못한 좋은 알밤이 숨어 있을 것이었다. 서리를 했던 전적이 있는 나는 꽤 쓸만한 알밤이 어디쯤 있는지도 알고 있으니 누군가 줍기 전에 먼저 가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알 리 없는 선생님은 가정방문차 동네에 들어섰다. 같은 반 아이들 집 안내 역할을 부여받은 마음은 콩밭에  있는데, 선생님은 햇빛에 탄 건지 선생님을  만나  붉은 건지 모를 학부모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거북이걸음이었다.  

동네  입구에서  출발해서  세 번째로 들른 우리 집,  엄마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셨고 할머니는 수돗가에서 하얗고 긴 머리를 감고 계셨다. 머리를 감고 있다 맞닥뜨린 어려운 손님에 할머니는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가을빛에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 세숫대야와 할머니가  닦고 있던  흰 고무신이 있는 시멘트 수돗가, 희고 긴 머리카락을 손에 감아  물기를  짜고 계시던  할머니, 덩달아 당황한 선생님, 그  와중에 주운  밤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할머니를  부르며  들어온  시골뜨기  남동생들.

스레트 지붕아래 마루에서 멋쩍게 머리를  빗고  은비녀  쪽을 짓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선생님은 우리 집에서 뒤로 두 집 건너에 있는 친구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날 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다음 동네 친구집까지 가야 했다.  해 질 녘 가정방문을  마치고  돌아가시던  선생님은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으로 인물 꽤나 나올 좋은 동네라고 한 말씀 하셨지만 아무런 관계없는 나는 그해 아쉽게도  밤이삭을  줍지 못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른들은  새마을회 공동명의로 되어있는  산을  개간해서  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마을  뒤쪽 샘골 너머 토골에 두 해 전  심어놓았던 사과나무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밤나무를 심었다. 2년 전부터 우리는 사과나무가 있는 과수원을 꿈꿨다. 하지만  토끼가 나무를 갉아먹어 버리는 통에(아버지는  갉아먹힌  이빨 자국으로  미루어  토끼짓이라고  여겼다) 새콤한 사과 하나 보지 못한 채 밤나무 밭으로 바뀌고 말았다. 한해만 기다리면 사과가 열리고 사과나무집, 과수원집 딸이 되는데 토끼 때문에 그만 밤나무집 딸이 되어버렸다.


건너 밭에  딱 한그루  밤나무가  있을 때만 해도  밤은 장대로 한송이 남김없이  터는  것이었다. 알밤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줍는  것이 아니라  대충  익었겠다  싶을 때  장대를  가지고  털었다. 그리고  커다란  짚으로  짠  가마니에  담아 집으로 가져와  묵혀두었다가  꺼내보면  밤송이가  삭거나  익어  알밤을  까기  쉬웠다. 마당 한가운데  부어놓고  장화신으로  비비고  낫 끝으로  조금  벌어진  밤 입을  벌려 가며  알밤을  꺼냈다. 한 그루일 때는  그것이  정석이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동네사람 모두 그렇게 했다. 그런데  산을  개간해서  밤나무를  심고 3년이  지나자  이제  그렇게  할 수  었다. 알밤이 빠질 즈음이면 아버지는 새벽마다 토골에 가셨다. 주말이면  나와 외할머니까지  산에  올라 송이째  털어진  밤송이를  데굴데굴 한 곳에  모아놓고  호미로 콩콩 찍어  까던  기억도 있다. 산을 개간해서  밤나무밭을  만든  규모가  우리보다  더  넓은  집은  사람을  사서 밤을 주웠다. 손 빠른 엄마는 종일 다른 집에 가서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양동이에 밤을 주워 담았다. 우리는 보통의 규모였지만  한창때 아버지는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두 번 걸음을 하실정도였다. 알밤이  빠지는 한창때가 지났다 싶으면 벼베기가  시작되었다. 가을일은 이어달리기를 했다.


이쯤 되자 엄마는 아침 첫차를 타고 밤을 팔러 나갔다. 오후 늦게 밤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허리에 맨 전대에서  지폐를  꺼내  주며  나보고  굳이  세어보라고 했다. 몇만몇천원이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에  할머니는  '아이고  점심은  먹고  했다냐?'라고  그제야 걱정을 했고,  돈의  숫자가 크면 클수록 만족스러운 표정이  엄마 얼굴에  퍼졌다. 그리고 시장에서  있었던  궂은일은 손때 묻은 지폐에 잊은 듯 또 저녁을 하러 부엌에 들어갔다.

공판장에  내면  좋으련만  소매와  도매가격은  두 배 넘게  차이가  났기 때문에  한 닢이라도  더  벌려면  남광주 시장으로 가서 단속반을 피해 밤이 들어있는 대야를 이고 뛰어야 했고, 다시 너릿재를 넘어 읍내 아파트 앞에 전을 펼치고 앉아  길가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끌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오래된 이야기는 아주 한참 뒤에 내 귀에 들어왔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의  말에  귀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장날, 엄마는  학교가  끝나고  버스터미널 근처  양품점으로  오라고 했다. 양품점에  갔을 때  엄마는  이미  사장님과  이야기를  맞춘 뒤인 듯  두벌의  옷을  입어보라고 했다. 니와  달리 옷에 별 관심이 없어 물려 입거나 사다 주는 대로 입던  나는  그날, 세일러복 같은 윗옷에  플레어스커트와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와 치마를 얻었다. 옷값은 엄마가  며칠을  시장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판 알밤값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옷 갈아입는 장소도 마땅찮은 양품점 구석에서 새 옷 냄새에 몸을 구겨 넣느라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내 땅이 아닌 단감밭을  지나다  뚝 따서  바지에  쓱쓱 닦아  한입  쩍 베어 물어도, 물어보고나  먹으라고 쓴소리 한마디는  할지언정 법까지  들먹거리는  일은  없던  세상이었는데 , 아버지가  누워계시는  산소  입구에는

"불법임산물  채취금지, 산주 등의 동의 없이 임산물을 불법 채취하다 적발될 경우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73조에 따라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주인백"

이라 쓰여있는 표지판이 서있다. 형부가 고사리와 밤을 배낭 가득 가져가는 사람들 등쌀에 시달리다 못해 말뚝 박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눈은  밤이  열렸을 때만  본다. 나도 사과밭이나 포도밭에서 빨갛게 익은 사과만 본다. 주렁주렁 열린 포도알만 본다.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밤나무집 딸은 밤이  열리기까지  이른 봄부터 가지를  치고, 밤나무  한그루마다  멀찌감치  구덩이를 파고 거름과 비료를  주고,  여름이면  항공방제뿐만 아니라  직접  한번 더  병해충방제용 약을  한다는 것을 안다. 사과나무집 딸도 포도나무집 딸도 그럴 것이다.


눈곱도 떼지 못하고 밤나무 밭을 향해 늘어진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산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아버지다!'

'나 여기 있다!'

산에 대한 인사인지 이제야 오는 딸에게 반가운 인사인지 모르지만 나는 산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를 했다. 밤나무밭은 아버지의 헛기침소리를 듣고  자랐다. 밤나무집 주인이 젊은 농부였을 때는 딸은 어쩌다 한번 주인의 의지에 의해 농약줄을 잡고 따라다녔고, 몇 번 눈곱도 떼지 못한 채 알밤을 줍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의 헛기침소리가 뜸해지자 밤나무밭은 늙어갔다. 몇 년은 돌봄을  받지 않고 추석 때면  들러 산짐승들과  나눠먹자  알밤마저 시들해졌다.


이제  아버지가  심어놓으신  밤나무는  거의  없다. 해묵은  나무들은  형부손으로  새로운  나무들로  세대교체가  되었다. 동네에  처음  조성되었던  밤나무 밭들  대부분이  자식 들손에  맡겨졌고  그때  심었던  나무들과 함께  어른들도  이제  세상에  없다. 단지  거의  밤나무밭 옆에 동그마한 집을 짓고 가을이면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버지도 저 멀리  아버지가가 농사지으시던 논도 내려다보이는 곳, 밤나무 밭에서 지켜보고 계신다.


 혼자서  줍다 보면  세 시간이라는  언니의  말에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볼까  싶어  밤나무를  흔들었다. 빠찔까 말까  망설이는 밤톨과  밤송이보다  새벽이슬이  먼저  후드득  떨어져  머리카락을  적시고  하늘색 윗옷이  파랗게  변해갔다. 나무를  흔들 때는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럴 때마다   밤송이에  맞아 허공을  보는듯한  한쪽눈으로  100세까지  살다가신  외할머니친구  수아할머니가  생각났다. 그  할머니도  이건밭이라  불리는 마을 앞  둔덕에 자리 잡고 계신다. 그 밭에도  밤나무가  여나무그루  서있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  어른 들은  밤나무밭 (산이었지만 당신들의  손으로  밭이 된)에  둥근 집을 짓고 그곳에 계. 우리 아버지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외증조부까지 토골 밤나무밭  위아래로  계시듯이.



아직 한창인 밤나무가 걱정되어 나는 아픈 어깨를 최대한 적게 사용해서 가지를 흔들었다. 내일모레 떨어질 알밤을 미리 떨구어 주어 갈 생각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한 가지를 잡고 흔들었다. 후드득 알밤이 빠지거나 밤송이가 데굴데굴  굴렀다. 그렇게 흔들고 줍느라 네 명의 벌초팀과 거의 비슷하게 일이 끝나갔다.  마지막 남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산소로 내려오는 아들에게 근처 밤나무를 좀 흔들어달라고 했더니 쪼그리고 앉아  양손으로 가지를 잡고 탈탈 흔들었다. 그야말로 뿌리까지 흔들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삼손을  보는 듯했다.

"아니 익어가는 밤송이나 알밤이 떨어지게끔 힘조절을 하라고!"

아직 알밤을 꺼내놓을 생각이라고는 한점없는 애송이도  떨어져 내렸다. 장화발로  비벼  풋밤을 깠다. 풋내가  났다. 쪼그리고 앉아 입으로 껍데기를 벗기고 오도독 씹어보았다. 풋풋하고 여린 나름의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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