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핸드폰 너머새소리가 들린다. 어제 원룸살이를 마치고 아파트로 이사한 내 작은 새는베란다에 들어온 나그네 새가 창가에 앉아있다 자신을 보고 놀라 유리창에 날개를 부딪히는 것을 보고 이걸 어쩌면 좋냐고 쉴 새 없이 지저귀고 있었다.
"얼른 창문을 열어주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창문을 열어놓았는데 나갈 생각을 안 해! 건조대에 앉아있어. 이젠 베란다 바닥에 앉는데?"
"아유, 그럼 같이 살아야겠다! 오늘 쌀 주문했다며? 둘이 사이좋게 나눠먹고살아!"
"엄마, 사진 봐봐!"
내 작은 새가 창문을 열어놓고 나그네 새가 창밖으로 날아가길 기다리는 사이, 핸드폰 화면에 사진이 쏙쏙 들어온다.
"어? 어제 내가 본 새와 비슷한데..."
"아 , 이제 나갔어! 다행이다... 엄마, 어제 새 나간 거 봤어? 분명 창문 모두 잠그고 잤는데 새가 들어와 있어!"
"글쎄, 나도 어제 어떻게 새가 들어온 건지 잘 모르겠어..."
이사 첫날인어제도 그곳에 새가 있었다. 어두운 새벽에 출발, 아침 일찍 새로운 집에 먼저 도착한 우리 부부는 미리 들어와 있는 소파에 기대 눈을 잠시 붙였다. 잠시 후 남편은 바람도 쏘일 겸 아침 시장기를 면하게 할 만한 것을 찾아보겠다며 아파트 주변 산책을 나갔다. 혼자 여전히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의 땅에 한 발을 담그려는 순간 유리창에 뭔가 불규칙적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소리 나는 곳을 찾아 베란다에 나가보았더니 새 한 마리가 푸드덕 창문을 향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얼른 방충망이 없는 쪽 창문을 열어주고 창문 앞에 서있는 나를 두려워할세라 거실로 몸을 숨겼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순간 쌩 날아가버렸는지 금세 뒤돌아 보니 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침 공기가 꽤 사나웠다. 얼른 창문을 닫았다.
그렇게 연 이틀째 새가 날아 들어왔다. 아니, 이사 온 우리보다 먼저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도 간다. 첫날은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라 '남편이 창문을 열어놓는 사이 들어왔었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남편은 방충망이 있는 창문만 열어보았고 추워서 다시 닫았다고 한다. 그러면 이 집 어디엔가 새가 들고날 수 있는 구멍이 있던지, 아니면 어제 그 새가 나가지 않고 어디엔가 숨어있다가 다음날 아침 파닥거리는 것이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넓지 않은 집에 여섯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삿짐 정리를 하겠다고 종일 부스럭거렸는데 아무런 기척 없이 새가 숨어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밤에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잤다는데, 어디서 새가 들어왔을까? 베란다 바깥쪽으로 야구공보다 조금 작은 구멍이 있어 도시쥐는 2층까지 올라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농담과 함께 작은 물병으로 막아놓기까지 했는데... 생각할수록 미궁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나그네 새가 낯설지 않다. 첫날 보았을 때부터 낯선 새가 아니었다. 내 눈으로 직접보고 사진으로 다시 보니 새가 눈에 익었다. 기껏 알고 있는 새는 참새, 까치, 까마귀, 비둘기 정도인데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생김새였다. 검은 머리에 흰 양쪽 뺨, 배 가운데로 검은 넥타이를 맨듯한 줄무늬.
'미영새다!'
찾아보니 어릴 적 미영새라 불렸던 박새였다. 어릴 적 엄마에게 배운 미영새를 만난 것이 너무 반가워 미영새에 관한 것을 찾아 읽는 재미를 맛봤다. 미영새(박새)와 미영솜(목화솜)은 '미영'이라는 공통의 단어가 들어있다. 내게 미영솜의 '미영'은 미영새 이미지를 덮어씌운다. 그래서 미영새의 '미영'은 밝다는 의미로, 미영솜은 무명솜 목화솜의 사투리로 같은 글자이지만, 나에게 '미영'은 솜털 같은 따뜻함과 포근함을 담당한다. 그래서 '밝을 명(明)'의 미영새이건 '밝다'에서 온 박새이건 나의 미영새는 미영(목화) 꼬투리에 구름실처럼 뽑혀 나오던 목화솜 같은 푸근한 새의 이미지로 저장되어 있다. 걸맞게 미영새의 생김새도 몽글몽글하다.
원룸에 살던 딸이이사를 갈 거라며 추석에도 아무런 반찬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해서 빈손으로 보낸 것이 안쓰러워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 서울로 간 날이었다. 출발한 시각이 새벽 네시반, 분명 도로 위에 우리밖에 없는 듯한 출발이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화물트럭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경기도 안성쯤 올라가니 하늘빛이 날갯짓을 하는 홍학의 깃털처럼 나풀거렸다. 어느새 날이 깨고 있었다. 어쩌다 한번 새벽 운전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남편의 눈을 보며 모두 잠든 시각 매일 새벽길을 열고 운전하는 그들의 노고를 어림짐작해 보았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 익은 일이 가장 쉬운 일이라는 것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여가며 달렸다. 교통지옥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나섰건만 서울 입구에서부터 거북이걸음이었다. 아주 오래전에도 그랬지만 느린 차량행렬로 빼곡한 서울, 여전히 살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서울은 30년 전부터 살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둔 친구들이 한국통신 시험준비를 한다고 했다. 자퇴를 하고 빵집알바를 거쳐 사촌언니가 운영하는 학원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전화 한 통으로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고 덩달아 시내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렇게 몇 달을 공부하고 시월, 상경해서 시험을 보았다. 시험을 마치고 나온 세 친구는 콧속이 답답하다는 둥 이곳 공기가 탁해서 맘에 안 든다는 둥 서울은 사람살곳이 아니라며 서울하늘 흉을 맘껏 봐주고 내려왔다. 어떤 이에게는 신맛 1도 없는 청포도였을 텐데 우리에게 서울은 이미 셔서 먹지 못하는 포도였다. 시험지를 제출하며 아마도 불합격을 예견한 탓이었다.
그보다 먼저 서울을 제대로 마주한 것은 1989년 여름, 중부경찰서였다. 일정을 마치고 땀에 젖고 추레한 모습으로 학교버스를 타고 내려가던 우리는 톨케이트에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등 떠밀린 채 소위 닭장차로 모두 옮겨 태워졌다. 전국대학생협의회(전대협) 소속 학생의 평양축천 참여로 세상이 발칵 뒤집힌 가운데 전대협 집회에 참석한 우리들을 맞이한 곳은 중부경찰서 내 구치소, 오픈된 소변기가 있는 그곳, 서울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훈방조치된 우리들이 바라본 서울은 이미 살고 싶지 않은 곳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 후 나는 슬로 시티, 중소도시에서 살고 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소도시의 느긋함과 촌스러움이 좋다. 딱 맞은 내 옷처럼 편안하다. 어쩌다 가는 서울은 잠시 쓱 지나오는 곳에 불과했다.
그런데 딸이 들어간 서울 어느 한 귀퉁이 아파트는 조용했다. 아침 일찍 도착한 그곳은 숨 쉬는 사람보다 지저귀는 새가 더 많을 듯했다. 앞베란다 앞으로 다른 아파트 단지와 경계에 심어진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푸른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건물 앞뒤로 심어진 나무 위로 참새도, 미영새도, 비둘기도 날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는 곳으로 이곳이 서울 맞나 하는 생각과 이런 서울이라면 싫지 않은 곳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전에 살던 사각형 원룸과는 다르게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반겨주고자 집으로 들어온 새, 다음 날 딸을 놀라게 한 새, 미영새 때문에 서울의 얼굴이 달리 보였다. 아니 내 작은 새가 살고 있는 곳이기에 어미새의 눈에는 이미 마음이 갔는지도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하는 도시를 익히려면 먼저 그 지역의 인구를 검색한다. 도시의 문화, 경제 등 대충의 규모를 그곳에 살고 있는 인구로 가늠한다. 서울은 970만,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인구와 합하면 천만에 다다른다. 대한민국 인구의 약 5분의 1이 살고 있는 곳에 딸이 산다. 아들들은 또 다른 지역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독립한 내 작은 새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 뉴스에 촉을 세우고 살피는 어미새가 된다.
이제 서울에도 내 작은 미영새가 살고 있다.
미영새와 같이 보호새로 폭닥한 둥지에서 쉴 수 있기를,
유리창에 부딪혀 날갯짓을 하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고 맘껏 날 수 있도록 닫힌 창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의 손길이 그치지 않기를 어미새는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