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더분한 버마재비 Mar 20. 2024

서리꽃 피는 아침, 여행을 그만두기로 했다

 

가로로 길게 찍힌 매화꽃 한 가지,  편집창을 통해 회전시키고 자르는데 투명한 얼음알갱이들이 한 올 한 올 살아난다. 거미줄도 곧 손으로 만져진다. 차갑다. 나도 모르게 입술 위에 올라온 물집을 혀끝으로 만지고 있었다.


 서리꽃이 소금알갱이처럼 피워 올랐다.  

'작년 가을, 사과가  금값인 이유가 저 서리꽃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상고온인 낮과 달리 밤이면 급격하게  떨어지는 기온차 때문에 발생한다던 냉해피해 기사가 떠올랐다.

이상기후로 인해 해마다  봄은 조금씩 조급하게 찾아온다. 이에 질세라  꽃들은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꽃을 피운다. 확대된 사진을 보니 꽃샘추위 그 냉기가 보인다. 꽃봉오리 등으로 달려드는 얼음 같은 새벽 찬 공기, 찔끔 감아버린 꽃눈. 맞다. 그날 이른 아침,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었다.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 아침, 입술에 물집이 올라왔다. 겨우 2박 3일, 친구들과 산골에 콕 박혀 나오지 않고  먹고, 자고, 수다 떠는 , 쉼이 전부였던 여행이었다. 이틀째  되는 날.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가까운  기차역에  데려다주고, 근처  카페에  들러  차 한잔하고  돌아왔지만  그것 또한 잠시였다. 그런데 입술이  트더니  물집이  잡혔다.


 2박 3일 여행, 기껏 놀고 와서 피곤한 것이었다. 평소처럼  엄마를  모시고 나와  익산역에서  친구들을  태웠다. 두 시간여를  달려  시골집에  엄마를 모셔다  드리고,  다시  친구들과 시골집에서  30여분 거리  산속집에서  두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올라  엄마를 시골집에 가서  모시고 중간에  정읍역에서  친구를  내려주고 올라오는데  졸음이  려왔다. 새벽 4시까지 수다가 무리였던 것 같다. 

올라오는 길, 남편은  중간에  어디쯤인지  물었다. 광주를  지나고  있었지만 이제  출발한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조심해서  올라오라고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일찍 와서  일을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건너온다. 졸음쉼터에서 쉬었다 갈까 했지만 달렸다. 이틀 동안  혼자  일하느라 힘들었을  남편이기에  엄마를  집에  모셔다 놓고  다시  가게로  향하는데  눈물이  났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할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  나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동동거리고  있을까?'

아주 가끔 일던 생각이 확 덮쳤다. 

가게에  일하며  잘 놀고  왔느냐는  남편의  물음에 대답도  없이 웅얼거리며  일을 했다.  한창 바쁜 일이 마무리되어 가자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남편은 그만하고  들어가라고 떠밀었다.


잠시 가게  난로 앞에 앉아  친구들에게 문자를  날렸다.

'당분간  여행계획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여행지에서  우리들에게 수녀님은  머무는 곳에서 가을 침묵피정을  권유했다. 하루 일상을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말에  우리는 가을에 다시 만나자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은, 기차를  타고 집으로  한참 달리고  있을 친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여행계획을 취소해 버렸다. 우선 조바심 없이 평이한 일상에 머무르고 싶었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오히려 내 건강을 걱정해 준다.


이 모든 것이 분명 한 달 전 걸린 상포진 때문이다. 진찰실에  들어가자마자 드러낸 목덜미를  보더니 젊은 의사는 말했다.

"대상포진이네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창으로 이미  나름 진단을  내린 상태였다. 단순한 피부염이었으면 하는 손톱 반달만큼 바람도 갖고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개울가 버드나무 물이 오를 듯 날이  풀리자  연두색  니트를  원피스 위에  걸쳐 입었었다. 마음이 산뜻해지는  색깔이었다. 풍덩한 니트 올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와   이른 봄에도  가을에도 입기 여의치 않았기에 이때다 싶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스웨터 브이라인이  지나가는  목덜미가  간질거렸다. 손으로  살살 긁었더니  점점 그 가려움이 자리를 넓혀갔다. 까스락거리는  털실 때문인가 싶어  스웨터를 벗어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두드러기같이  올라온  붉은 돌기는 오른쪽  목덜미를  타고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주변까지  이어졌.


병원을  다녀온 날  저녁, 약을  먹고  전날 보다  일찍  자고  일어나 보니  어젯밤  발라놓은  연고 덕인지  올라온  붉은  돌기들의  노기가  가라앉고 하룻밤을  더 넘기고 나니 약간  거무스름해져 갔다. 그런데  두드러기 같은  붉은 돌기들이  잦아들자  이젠  오른쪽  귀와 머리에서  지~잉 하는  살짝 찌름과 동시에  번져가는  통증이 가끔씩  반복되었다. 두드러기가  일어날 때면 쏙쏙쏙  개미가  빨대를 꽂고  빨아들이는 듯 아리기 시작했다.


 대상포진보다  문제는 약에  있는 듯했다. 바이러스를 잡느라 그러는 것인지, 가려움증과 신경통을  잡느라 그러는지, 해열진통제를 포함한  약들 때문에  넣은  위보호제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여섯 개 알약 때문인지  몸이  흐물거렸다. 졸리고, 기운이 쏙 빠져나가  팔이  늘어지며, 매가리 없는 환자가 되어갔다.

일주일분 처방을 해줄 것이니  다 나을 때까지 계속 병원진료를  받으라는 의사 선생님 말과  대상포진은  완벽히  낫지 않으면  다시  재발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염려가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가까운 사람들의 한 다리 건너 사람들 중 후유증으로 구안와사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왜 그리 많은지... 정작 내 통증은 미미했으나 일어날 수도 있는 후유증과 약복용으로 인한 몽롱함은 나를 더욱 중병에 걸린 사람으로 몰아갔다.


그사이   봄은  달팽이 걸음으오는지  며칠째   부슬비가 내렸다. 엄마는 날이 궂으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다리 통증으로  시달렸을 게 뻔했지만 이번에는 얼굴에 드러내지 못했다.

"나 때문에  네가  더 힘들어서..."

"엄마는  쓸데없는  소리를  또..."

엄마의  말이  나오기가  바쁘게  막아버렸다. 그것마저도  내 목에  빨간 반점들이  검보라색으로  가라앉아가자  겨우 내놓은  엄마의  걱정이었다. 대상포진이  엄마의  궂은날  통증을 묻어버렸다.


대상포진은  열흘정도의  복약으로  두통이나  통증은 사라졌다. 대신  훅 올라오는  열기가  진득한  땀을   이마에  남겨놓고  지나가는  일이  가끔 생겼다. 대상포진 때문인지  작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갱년기  때문인지  모를  화마에  가끔  얼굴을  붉히며  이마에  밴  땀을  닦으며 예전의  내가, 건강이라고  온몸에  도배를  하고 있던 어제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 없이  해내던 일들이  버거워졌다. 오후  세시쯤 되면  쑥 들어간 눈은 휴식을  요구한다.  남편도  내가 해왔던  일을  자기 손으로  하며  들어가 쉬라고  하고, 집에서  나를  맞이하는  엄마는   어서 가서  쉬라고  손을  밀어준다. 한 해가 다르다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아직은 그래도 하루가 다르다고는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 여긴다.  


냉잇국, 쑥국, 쑥전으로 봄기운을  흠뻑 마시고  등뒤로  봄볕을  쬐어도  밑천이  드러난  마음은  허기가 진다. 이  허기는  갱년기와  대상포진에  이어  입술물집까지 불러왔다. 그래서  잠시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사는 오지랖을  덮기로 했다.

 둔한 나는  이제야  내 몸에  찬서리가  내리고 있음을 알아간다. 뾰족한 수 없는 해결책으로  내 몸보다 앞서 가지 않고 잠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기로 한다. 다시  예전과 같은 체력을  회복코자 함이 아니라 내가 내 몸과 익숙해져 꽃눈을 터트리고자 몸이 근질근질 해지는  날이  오면  툭툭 털고 일어날 것이다.


나는 지난 여행을 꼭꼭 씹으며 몸을 추스르고 있다.
우리가 모이는 날이면 으레 껏 주인장은 짚불구이를 준비한다.

산중의 밤은 바지런해서 짚불향이 가시기 전에 주인장 남편은 모닥불을 피운다.

 주인장 딸은 젊은 날 우리 노래를 메들리로 들려준다.

 부지깽이 모닥불을 건드리니 불꽃이 별처럼 타닥타닥 피어오른다.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우리들에게 딱 여고생들 같다는 부녀의 소리를 들으며 술 한잔을  마시고, 난로 위에서는 어묵국물과  군고구마 그리고  구운 닭이 입김을 낸다.

고개 들어  별을  올려다본다.

 다음 날  아침,

수녀님과  친구 둘이서  산책  나가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도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던 내게 글 쓰는데  쓰라고  준 서리꽃.

볕을 등지고 앉아 쑥과 냉이를 캐 밥상 위에 올려놓은 쑥국, 냉잇국, 쑥전.

그리고 불 끄고 누운 채 새벽 네시가 되도록 떨었던 수다들.

비타민이다.

작가의 이전글 봄 섬 욕지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