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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Jun 19. 2024

 새곰달콤, 내 작은 곳간 이야기

"이 동네  오래 살았지만  여기  자두나무가  있는 줄 몰랐네요!"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졸래졸래 흙을 밟으며 내 뒤를 쫓던 재재가 앞발을 들고 안아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가게 안으로  잠깐 들어와 있었다. 언듯 맛 좀 볼 수 있겠느냐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재를 내려놓고 두 손바닥으로  손우물을 만들어 붉은  자두를  퍼올려 나갔다. 지나가던  트럭  아저씨가  유리창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엄마, 제가  드렸어요!"

사다리를 타고  화물차 덮개 위에  올라  자두  따던 아들이 말했다. 아주머니 한분이 트럭에서 내려  손바가지에  받아 들고 차에  오르는 모양이었다.  벙그레 웃는 아저씨에게  내손의 자두를 옮겨드리니  화물차 안에 앉은  서너 분들이 고맙다며 와글짝하게 인사하고 떠났다.  

 '오, 가진 자!'

유치하지만 곳간에서 인심을  내어주는 기분, 유월 햇살만큼  바람만큼 소란해진다.


여덟 해 전,  우리는  비록 대출 가득이지만  이 터에 자리를  잡으려  폐기물쓰레기 수거  업체를 불러  전 주인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건설회사 사무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듯 각종 건설 자재더미로 어지럽혀진 마당을 치우고 나니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서있던 자두나무와  배나무가 낯선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무를  베어버릴까 했지만 원룸에 둘러싸인 그 빼곡한  사이에  푸른 숨구멍 하나 내어놓아야 할 듯해서 그대로 두었다.


고물상 아저씨가 널브러져 있던 건설자재를  가져가고 난자리에  허름하게 서있던 나무 밑에  마사토를  섞은  황토를  들여 손바닥만 한  밭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봄이면  거름 몇 포대  뿌리고 고추와 가지, 방울토마토 몇 그루를  심어 소꿉놀이 같은 텃밭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담을 쌓는 대신  연두색  철제  울타리를  두르고  오이와 호박줄기도  올렸다. 한 박자 늦은 농부는 아침이면  어제와 다르게  올라온  이파리와 열매에  눈맞춤하고,  퇴근길에  고추 몇 개와  방울토마토, 가시오이, 애호박 한두 개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맛이 들려 해마다 시장 종묘상에  들러  1~2만 원어치  사들고 와  본전은 남는 장사라며 심었다. 서너 해가  지나자  위로  비죽이  키만 키우며  꽃 한 송이  피우지 않던  배나무는 베어버렸다. 이미 몸피를  불린 자두나무  한그루로도 부족한 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후 언제부터였을까? 거름기를  쏙쏙 빨아올린 나무에 제법  붉은 자두가 열리면서 유월  중순을 지나 20일 즈음부터 새곰달콤 곳간에서 인심을 내어보게 되었다.(올해는 일주일정도 그 시기가 당겨진 듯하다.)

"고맙습니데이!"

옆집 원룸 사장님이 눈웃음을 지으며 건네는 경상도 말투로 달곰하다. 가을이면 미안해질 일을 미리 입막음하려는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그분은 자두나무 꽃이 피는 삼월부터 예쁘다고 한 말씀 해주신다. 자두나무 머리와 팔이 그 원룸의 주차장 상공을 점령해 버려 그 쪽을 잘라버릴까하고 말하는 남편을 말리며 부지런한 원룸 사장님은 가을이면 낙엽 청소를 군말 없이 해주신다. 우리는  수고로움에 대한  감사를 제일 먼저 챙겨드리려고 한다. 그리고  가게  정문 앞 원룸사장님네에도 자두가 건너간다. 단감이  나올 무렵이면  방금 딴 생생함이  꼭지에  물씬 묻은 감을 가져다주시는 분들이다. 또 부활절이면  무신론자인  우리 집에도  예쁜 계란을  가져다주시는  목사님이 계시는  교회건물에도 오르간소리가 나는 일요일 들어가 넘겨드린다. 그리고 재재의 간식으로 삶은 간을 챙겨주시는 순대국밥집에도, 그 옆 백반집에도 남편이 한 그릇담아 건네준다. 옥상에서 강아지라기엔 두 마리가 살고 있어 지날 때마다 아는 척을 하는 애완견을 키우는 이웃이자 오월 장미넝쿨이  담장 위에  걸터앉아 웅성이던 원룸 주택에도 넘겨드린다.


가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인사를 한다. 몇 년 동안  우리 가게를  드나들며 자두 맛을 보았던 사람들 중에는 오월부터 느닷없는  자두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남자들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남편도, 아들도 시큼한 자두를  그다지 애정하지 않는 것을  보다가  그런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을 보면  자두로  집사람에게  점수를 따고 싶은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관심이  싫지 않다. 그 맛이 최고라며 이렇게  맛있는  자두는  못 봤다는  그들의  엄지 척은 자두를  내어주며  그간  그들이  주었던  고마움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유난히  자두를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따로 냉장고에  저장을 하고  멀리 있는 가족들에게는  혹여  상하지 않을까, 상처가 나지 않을까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택배로 보낸다. 자두만  보내기엔 그 양을  맞출 수가 없어서  감자와 함께 담아 보낸다. 올해도  도착한  주먹만 한 이장님표 감자와 언니네 집에서 캐온  쪄먹기 좋은 감자를  신문지로  박스 안에 가림막을  치고  담아  부쳤다. 예쁘고  좋은 것으로  골라 박스에 담는 것은  내가, 테이프 작업과  택배회사에 가서  부치는 일은  남편이 한다. 택배를 받고 핸드폰 너머로 들려올 새곰달콤한 목소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손놀림은 바지런하기만 하다.

"뭘 이렇게 많이 보냈어?"

많으면 주변 사람들과 나눠먹으라며 내 자두가 또 다른 인심을 내줄 거라는 것이라는 기대에, 우스꽝스럽지만 잠시 다단계 피라미드처럼 그 인심이 퍼져나가는 것를 떠올려본다. 이장님과 언니가 보내온 감자를 내가 다시 몇 집에 나눠준 것처럼 말이다.


풀빛이던 자두는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붉은 자두가 푸른 잎 사이로 제 모양을 드러낼 때쯤에야 올해는 많이 열렸나 아니면 지난 해 보다 적게 열렸나 알 수 있다. 자두나무가  '나 여기 있소!' 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은 딱 두 번, 오얏꽃이 필 때와 자두알이 붉은 자줏빛으로 물들어 갈 때이다.  하지만 올 해는 하얀  오얏꽃이 진 자리에 성냥개비 유황처럼 자두알이 맺히는 순간부터 엄지손톱 만하던 것들이  자라더니 탁구공만 해지고, 녹황색으로 변하더니 조금씩 울긋불긋해지는 모습을 매일 아침 확인했다.

 이유가 있다. 지난해 진딧물과 쐐기로 범벅이던 자두나무는 일찍 단풍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바삭거리는 이파리를  여름이 가기 전부터  떨어뜨렸다. 그래서  올해는 꽃이 지고 어린 자두가 맺힌 뒤 약을 한 번 해놓고 거의 매일 아프지 않고 잘 자라나 지켜보았다. 물론 내가 바라본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마는 아침 출근해서 햇볕을 먹고 어제와 다르게 부풀어가는 자두알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퇴근길마다 남편손에 무언가 들려온다. 아침이면 가게 부엌에 익숙하지 않은 물건들이 보인다. 국수다발과 부직포 행주묶음, 제주도에서 올라온 비스킷, 참외와 수박등이 그것이다. 아무래도 손우물로 퍼드린  새곰달콤한 인심이 마중물이 되어 작두샘처럼 퍼올리는 모양이다. 머쓱해진다. 

  

하얀 오얏꽃이 필 때부터 피어오르던 두둑함은 햇볕을  먼저 먹은  위쪽부터 아래 그늘진 곳까지 붉은 자두가  되어가는 보름정도 시간, 우리는 이 동네  어느 누구보다  가진 자가 되어  절로 피어오르는 후덕한 웃음을 피운다. 줄 것이 있다는 그 여유로움. 이른 아침,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지나가는  미화요원아저씨에게 달려가 자두를 챙겨드린 남편은 오늘도 전화 중이다.

"우리 가게 들러라! 와서 자두 따갖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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