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종 뽑는 날, 충전 중입니다.

by 수더분한 버마재비

오랜 물막이공사후 매립지가 되어버린 들판 쪽에서 뻐꾸기가 운다. 맞은편 산에서 멧비둘기가 꾸우 꾸우 나도 있다고 한다. 열한 시를 넘겨 달궈진 햇살이 옆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앞으로 질끈 묶은 모자 그늘이 내 시선을 마늘 밭에 가둬놓는다. 등뒤로 햇살이 앉아서 나를 덮인다.

어제 내린 비로 말캉해진 땅을 장화발로 밟고 마늘꽃대를 잡아당긴다. 줄기 사이를 빽빽한 느낌으로 밀리듯이 위로 올라오던 대궁이 '똑' 끊기는 그 맛이 제법이다. 간혹 멀리 있는 꽃대를 잡아당기려다 뿌리를 밟지 못해 땅속에 있던 마늘이 쑥 올라온다.

'마늘 뽑힌다고 조심하라고 했거늘... 아휴, 울 서방님이 좋아하는 생마늘, 일부러 뽑은 셈치자. 그렇지만 세 뿌리나 뽑은 것은 주인장에게 비밀, 쉿!'


며칠 전 보다 훨씬 긴 마늘종이 여기저기 올라와 있다. 지난번에는 손이 빠른 지인과 함께 왔었다. 미나리도 한 줌씩, 주름치맛자락 같은 붉은 상추도 도려 그득하게 싸들고 돌아와 나눠 먹었다. 그때 만든 건새우와 파랗게 데쳐낸 마늘종을 함께 볶아낸 반찬과 생 마늘종과 고추장은 밥상 위에 매일 올라오고 있다. 더 이상 마늘종은 솔직히 필요치 않다.


새벽, 마늘종 좀 뽑아가라는 전화가 왔다. 초저녁 잠이 많고 부지런한 큰 시누이의 시간과 내 시간은 다르다.

"저번에 뽑아왔는데 또? 마늘종 제거 작업을 해달라는 거지?"

"뭐 고모는 마늘종 제거돼서 좋고 나는 마늘종을 얻어서 좋은 거지. 시누이 좋고 올케 좋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

남편이 빙긋이 웃으며 건네는 말에 너른 품을 가진 척 튕겼다.

'게다가 일이라 생각될 만큼 많지 않아서 더 좋아...'는 꿀꺽 삼켰다.


밭주인은 아침 출근시간을 곁눈질해 가며 마늘종 제거 시기를 놓칠세라 작고 다부진 손을 쉴 새 없이 부려가며 종종걸음 쳤을 것이다. 농사일은 몇 달에 걸쳐 훔쳐간 피땀을 고작 쥐꼬리만 한 쌈짓돈을 던져주고 만다. 그래서 칠순의 농사꾼에게 골프장에서 누군가의 샷에 패인 땅을 메꾸고 받는 임금은 놓치고 싶지 않은 일자리임에 틀림없다. 농사일은 그 시기가 있다. 그때를 놓치면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꽃대를 올리고 그 위에 종자를 만드느라 땅속 마늘로 가야 할 기운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마늘종을 뽑아주는 일, 쉬는 날도 없이 골프장으로 출근하는 밭주인의 마음을 쫒고 있었다.


하지만 농사꾼이 아닌 내게 마늘종 뽑는 일은 쉼이다. 물론 적당한, 힘들다 여겨지지 않은 시간 내에 이루어진다면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오늘도 오전일을 대충 끝내고 빈 틈이 생겼다. 틈사이 숨을 쉬고 싶다. 그래봐야 한 시간여 남짓, 내 터를 벗어나 일이 아닌 휴식을 취하고 싶다. 남편에게 달아래산마을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쉬 그러라고 한다. 바구니와 봉투를 챙겨 출발했다. 길 양옆으로 드러난 논에 황새가 먹이를 찾아 부리를 주억거린다. 논갈이하는 트랙터 뒤로. 지난번에 보았던 밀밭을 지났다. 눈이 시원해진다.


보리밭보다 흔치 않은 밀밭, 멈춰 담아봄.

에 처음 들어서면 며칠 전의 기억은 까맣게 사라지고 덜컥 뽑아내려 용을 쓴다. 두세 개를 끊긴 채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미지근한 힘으로 달래고 어르듯 뽑아내야 함을 기억해 낸다. 과한 힘을 가하면 쉬 대궁이 끊긴다. 아귀힘이 너무 작으면 또 올라오지 않는다. 너무 약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 않는 힘의 세기, 이런 힘의 균형을 찾기가 쉽던가? 마늘종이 나를 가르치려 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던가? 세상사 쉬운 일이 있더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부둥켜안고 있으려는 껍질의 저항이 손에 닿는다. 저항의 그 빽빽함이 주먹 안에 잡힌 대궁을 타고 내게 전달된다. 내 손은 거칠지 않고 꾸준한 힘으로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꽃대의 힘을 가늠하며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일정한 힘을 수직으로 허공을 향해 끌어올린다. 어느새 끊긴 대궁이 마늘대 속에서 나오는 그 순간, '뜨뜨뜨트드 뽁' 소리가 들린다. 아니 들리는듯하다. 그 대궁을 끓어 올리는 내 머릿속에만 들리는 마찰음과 파열음일 뿐이지만 그 소리가 주는 끌림을 따라 어느새 내 왼발은 마늘종이 올라온 다른 마늘 옆으로 옮겨가 있다. 햇살과 바람이 일렁이는 마늘밭에 뻐꾸기와 산비둘기 울음이 쌓인다. 나도 모르게 후욱 한숨을 뱉는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만큼 젖어있던 속내 물기가 걷혀간다. 장화발이 끌어올린 땅 속 기운으로 나를 닦아내고, 햇살과 바람과 새소리를 온몸에 바르는 시간. 나는 충전 중이다.



오늘도 밭주인은 마늘종을 뽑다 골프장으로 출근한 모양인지 마당 한 귀퉁이 세발 달린 리어카에 내가 뽑아낸 것보다 더 많은 마늘종이 털썩 힘을 잃고 쓰러져있다.

"점심은 먹었는가? 파란 상추도 솎아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를 보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니 CCTV가 연결된 컴퓨터 모니터를 집안에서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골프공이 치고 지난 자국을 메꾸기 위해서 수 없이 허리를 굽히던 밭주인이 핸드폰으로 마당 앞에서 꽃상추를 솎고 있는 내 모습을 본 모양이다.

꽃상추는 겉잎을 뜯어내고 아삭한 이파리를 도려 담고, 푸른 상추는 빼곡해서 솎아냈다. 주먹쌈에 딱이다. 다시 일터로 되돌아오며 시간 있다며 함께 가자고 청하던 지인을 불렀다. 마늘종도 상추도 넉넉하니 나눠먹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