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단비다. 전국 곳곳이 대형산불로 인해 떠들썩하더니 다행스럽게도 어젯밤부터 비가 내린다. 흙냄새를 맡고 싶어 텃밭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오얏나무 한그루가 텃밭을 포옥 감싸고 있다. 그만큼 작은 땅이다. 고개 들어 올려보니 오얏나무 꽃잎이 반쯤은 떨어지고 반쯤은 물에 젖어 모양새가 말이 아니다. 텃밭은 오얏나무 향기마저 마셔버렸는지 달큼한 꽃향기도 사라졌다. 목마른 땅은쓰읍 소리를 내며 빗물을 빨아들이는 듯하다. 며칠 전 뽑아놓은 광대나물, 뚝새풀과 별꽃들이 다시 이 생명수를 먹고 살아날까 걱정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날을 좋아한다. 한가롭게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있는 이 순간을. 비가 오면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이 천천히 흐른다. 그리고 눈앞에 있던 모든 것들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소리를 따라 걷는다.
배 깔고 엎드린채 작은방 옆문 밖으로 시선을 던지면 문턱 밑에 쌓아놓은 멍석이 보였다. 그너머 비에 젖은 대추나무가 새초롬이 서있고, 그 사이로 빗물은 모이고 모여 휘돌아 앞마당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때 그 냄새. 흙이 물에 젖는 냄새, 멍석에 습기 배어드는 냄새.
옷 다 젖는구만 저거 또 저러고 있네-
곰방대를 문채 마루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시원스레 비가 내리고 이내 장마가 되어버린 어느 여름날이었다. 뒤란에서 빗물이 쿨렁쿨렁 앞마당으로 휘돌아 흘렀다. 감나무 대추나무 이파리, 뒤란에 쌓여있던 잡동사니와 먼지 덩어리들이 떠밀려 나와 여기저기 흩어졌다. 이때였다. 잠방잠방, 내가 그 마당에 뛰어들 시각이었다. 뒷마당 감나무 아래에서 시작했다. 후드득 떨어지던 빗소리가 감나무 잎사귀를 타고 내리느라 한 박자 쉬고 뚜욱-뚝 떨어졌다. 대추나무 가지를 싸리빗자루 손잡이가 건드렸는지 오도도도- 빗물이 고스란히 떨어져 등에 달라붙었다. 나는 더욱 신이 나서 싸리빗자루로 싸악싹 소리를 내며 쓸어 나왔다. 흐르는 빗물이 빗자루질을 부드럽게 밀어주었다. 뒤가 뚫린 파란 슬리퍼에 물이 철퍼덕거렸다. 외양간에서 고개를 내민 암소 한 마리가 뎅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바탕 날궂이를 마치고 마루에 앉으면 할머니는 수건으로 내 머리를 닦아주었다.
아직 새파란 것이 무슨 새치가 있다냐?
흰머리를 틀어 올려 은비녀를 꽂은 할머니는 내 머리를 만졌다.나는 게슴츠레 눈을 감고 할머니 옆에 모로 누웠다.
내 맘도 저렇게 싸리빗자루로 걷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검불을 걷어낸 마당에 빗물이 작은 강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빨리 흘러 모든 게 선명하게 얼른얼른 결정되었으면 했던, 세상이 희미해 보였던 시절에. 그럴 때마다 잠으로 내달렸던 그 시절에.
할머니의 버석거리지만 달착지근한 손길에 꿈과 현실을 들락날락하는 사이 빗방울은 어느새 처마 밑에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웅덩일 만들어놓고 동그란 파도를 그리고 있었다.
한숨을 자고 나면 시장기가 돌았다. 뒤란 장독대에 맨드라미 잎을 땄다. 솔부추도 베어 왔다. 얼큰함을 더할 고추도 몇 개 땄다. 그리고 석유곤로 심지에 불을 붙이고 프라이팬을 얹으면 부침개 부칠 준비가 다 된 것이었다.
콩기름을 작은 종지에 부었다. 아주 조금. 조각낸 감자조각 밑면을 식용유 종지에 찍어 달궈놓은 프라이팬 위에 원을 그리듯 몇 바퀴 돌렸다. 치지직 치익, 기름이 냄새를 피워 올렸다. 곧 치덕치덕한 하얀 밀가루 반죽은 노르스름하게 익어갔다. 비 오는 날 기름 냄새는 마음을 덥혔다. 보라색 맨드라미 이파리와 푸른 부추, 알싸한 고추가 달궈지는 지짐냄새는 내 마음에 고소함을 입히고 있었다. 습기와 함께 온몸에 들어앉았던 외로움과 불안과 조급함을 조금씩 밀어냈다.
퇴근길 막걸리 주문을 했다. 남편에게. 냉동실에 나뒹굴던 새끼 문어 한 마리와 오얏나무 아래에서 뜯어온 솔부추와 쪽파 한 줌으로 오늘 하루 수고로움을 달랬다. 노릇노릇 지져놓은 부침개와 달보드레한 막걸리로 비 오는 날을 기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