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고급진 밥상을 받아놓고 나온 말이 '밥 먹으면 밥통, 죽 먹으면 죽통'이라니... 남편 왈 이것이 진정 밥통이기도 하고 죽통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맛이 어때? 그럴듯하지?"
"응, 괜찮네."
"엄마, 쫀득쫀득하죠?"
"오야, 내가 좋아하는 찰밥인디다 요렇게 귀허게 대통밥을 했는데 말해 뭐허겄냐?"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속에 맛있는 저녁을 먹다가 나온 이야기였다.
시아버지는 당신 성에 차지 않게 일을 해내거나 일일이 시켜야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한다.
'밥 먹으면 밥통, 죽 먹으면 죽통.'
이것은 말 그대로 그저 밥을 먹으면 밥통이 되고 죽을 먹으면 죽통이 되는 사람, 밥만 축내고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에게 던졌던 말이었다. 우리는 그릇도 아닌데 그릇으로 살지 말기를,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이라는 풀이로 저녁식사를 마무리했다.
어머니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흥은 많으셨다. 술 한잔 되시는 날에는 으레 껏 노래를 부르셨다. 노래는 지금도 제목이 뭔지 알 수 없는 앞머리와 꼬리를 자른 '영자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짤막짤막한 메들리로 연결되다 끝났다. 그래서 어머니 이름은 따로 있는데도 '영자야'로 기억된다.
친정아버지는 아프시기 전, 이렇게 말했다.
'괜찮해! 요까지 것 갖고 뭣이 어떻다고? 암시랑토 안 해.'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실 때 우리는 어디가 아프지 않은지, 춥지는 않은지, 덥지는 않은지 물었다.
'관찮해.'
아버지 당신이 말을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늘 같은 대답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말이었다. 괜찮해.
이렇듯 한 사람이 생을 마치고 나면 말이 남는다. 그 사람이 얼굴과 겹쳐지는 말.
내 어릴 적은 '몰라'로 남아있다.
딱 한 분 계시는 이모가 한동네에 살고 있었다. 이모네 집은 우리 집과는 동네 끝과 끝으로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전화도 없던 그 시절, 엄마 심부름을 갔다. 이모네 집 마당에 도착한 내게 이모가 물었다.
"뭔 일로 왔냐?"
"몰라"
그 후로도 한참을 나는 '몰라'와 함께 건망증이 심한 아이로 지내야 했다.
지금쯤 나는 어떤 말로 남아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