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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균 May 09. 2022

한용운 대 칸트

3장 근대인의 자유의 이행으로서의 「자유정조」     

인간의 이성이 대면하는 (관계 범주의) 이율배반이 자유의 원인성이 있는 ‘희망의 세계’로 열려 있다는 칸트의 ‘인과율’ 개념은 동아시아 근대지성인 한용운의 시적 사유에 의해 사랑의 열도(熱度)를 획득했다. 

이러한 (관계범주의)  이율배반을 대면하는 근대적 개인은 “당신이 지금의 이별을 영원(永遠)히 깨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의 최후(最後)의 접촉(接觸)을 받은 나의 입술을 다른 남자(男子)의 입술에 대일 수는 없습니다.”고 말할 때의 고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정미라는 데카르트나 칸트가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정립하는 고독한 주체의 사유 속에서 주관주의적이며 자율적인 능력만을 감지해냄으로써 “주체를 모든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단절된 고독한 개별적 자아로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고독은 량치차오와 한용운에 의해서도 이미 주목되고 있던 문제이다. 이 문제를 당시 량치차오가 해결하는 방식을 먼저 검토해 보자. 량치차오는 칸트가 성리학보다 낫지만 불교만은 못하다는 논지를 이렇게 제시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는 일체의 중생이 공유하는 본체로서, 한 사람이 각자의 개별적 진여를 갖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칸트는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진아를 갖는다고 말하며, 이 점에서 불교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한 명의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못하면 나도 성불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본체가 단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는 ‘보편적 구원’의 정신이 심원하고 간곡하다. 칸트는 우리가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고자 한다면 곧 선한 사람이 되며, 이는 본체의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수양의 의미가 더욱 실질적이며 쉽게 진입할 수 있다.”     

량치차오는 진아의 고독을 ‘보편적 구원’의 문제로 해결한다. 이는 칸트 이후 근대 사상의 흐름에서 가능한 중국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량치차오는 “개별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보편으로서 진여”를 통해 “칸트 이후 형성된 독일 관념론”에 조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량치차오가 말하는 “진여”는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처럼 그것은 세계가 작동하는 법칙이면서 또한 주관이다.” 

한편 한용운은 량치차오와 또 다른 사유의 결을 보여준다. 량치차오가 ‘진아=진여’의 헤겔화를 경유해서 국가주의에 빠져든 것과 달리 한용운은 불교적 사상에서 ‘상즉상리’의 원리를 가져와 ‘진아=진여’의 국가주의는 거부하고서도 진여와의 관계가 가능함을 주장한다.      

“양계초가 부처님과 칸트의 다른 점에 언급한 것을 보건대 반드시 모두가 타당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각 한 개의 자유스러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정한 자아와 각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진정한 자아에 대해 미흡함이 없이 언급하셨으나, 다만 칸트의 경우는 개별적인 그것에만 생각이 미쳤고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공통되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처님의 철리(哲理)가 훨씬 넓음을 알 수 있다./부처님이 성불했으면서도 중생 탓으로 성불하시지 못한다면 중생이 되어 있으면서 부처님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왜 그런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셋이면서 기실은 하나인데, 누구는 부처가 되고 누구는 중생이 되겠는가. 이는 소위 상즉상리(相卽相離)의 관계여서 하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부처라 하고 중생이라 하여 그 사이에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다만 공중의 꽃이나 제 이(二)의 달과도 같아 기실 무의미할 뿐이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한용운은 량치차오와 달리 칸트가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한 것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진아=진여(물자체)’는 성립하지 않지만 진아와 진여는 상즉상리의 원리에 기반해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를 통해서 한용운은 량치차오와 달리 칸트가 ‘자유의 원인성’이 지켜지는 예지계를 주장할 때 발생한 근대인의 고독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위안을 줄 수 있었다. 칸트의 고독을 해소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그 자체로 칸트 이후 지성사의 보편적 흐름에 동아시아적인 고유성을 기입하고 있었다.

‘진여’와의 상즉상리의 관계에 대한 한용운의 가르침은 1920년대의 근대 청년에게는 일정한 동시대성을 갖고 있었다. ‘미래’를 종교로 삼은 전위주의 와 ‘진여’의 신앙은 현재에 대한 충실성을 가능하게 하는 희망을 내장한다는 점에서 ‘칸트 이후’의 고독에 위안을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임화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다고 또한 내어다 볼 수 있는 미래의 길에 나타난다면 용이하게 시인은 그리로 향하여 질주할수있는 것이다. 우리 조선의 모더니즘은 비록 관념우에서 일망정 다행히도 그러한 길을 가지고 있던 예술이다. 감성의 활발한 도약은 현대에대한 비평의 정신으로 능히통어할수 있었을지 모르며 또한 반대로 그러한 정신이 감성의 활발한 도약에 원천이었을지도 모른다.”       

위의 인용에서 임화는 자신의 청년 시대를 “내어다 볼 수 있는 미래의 길”을 믿고 “그리로 향하여 질주할수있”었던 시대로 회고하고 있다. 

한용운의 상즉상리의 가르침은 1920년대 연애의 시대와 다른 근대성의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님의 침묵』의 시적 사유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한용운이 근대의 이율배반을 대면하면서 자유의 이행을 시적 사유로 개진하는 사례의 방증으로 「자유정조」를 검토해보겠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정조보다도 사랑입니다     

남들은 나더러 시대에 뒤진 

낡은 여성이라고 삐죽거립니다


구구한 정조를 지킨다고

그러나 나는 시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과 정조의 심각한 비판을 하여 보기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자유연애의 신성을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자연을 따라서 초연생활을 

할 생각도 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구경, 만사가 

다 저의 좋아하는 대로 말한 것이요

행한 것입니다.     

나는 님을 기다리면서 

괴로움을 먹고 살이 찝니다


어려움을 입고 키가 큽니다     

나의 정조는 

자유정조 입니다     

「자유정조」     

먼저 위 시에 대한 전통적인 독해를 소개해 보자.

최동호는 「한용운 시와 기다림의 세계」에서 시적 화자의 기다림이 “윤리나 규범에 따르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성립되는 자발적인 기다림”이라고 규정한다. 더 나아가서 “자유정조”는 “사랑이나 연애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정조의 자유도 아울러 드러낸 것”이며 “모든 관계의 자유스러움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기다려지는 님에 대한 사랑은 분명히 자발성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정효구에 의하면 이러한 자발적인 기다림의 의미는 위의 시의 세속적 정조와 진정한 사랑의 차이, 세속적 사랑과 진정한 정조의 차이의 입체적 조망 위에서 도출된다. 그리하여 “화자 자신의 님을 향한 기다림이야말로 ‘진정한 정조’와 ‘진정한 사랑’의 결합물로서 세속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곳에 있음을 사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독해에 대한 재해석을 보여주는 근래의 ‘문화사 연구’는 「자유정조」의 특징인 자발적인 기다림에서 전근대적인 특징을 발견한다. 『님의 침묵』에서 사랑의 “관건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면 이것은 한용운의 시가 근대적인 개인의 상호적인 계약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연애의 이상보다는 “전통적인 반려애”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정조」는 우리 사회에서 자유연애에 관한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제기된 1910년대 중반에서 192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나온 근대(자유연애) 담론에 대한 전근대(자유정조)의 반격으로 볼 여지가 있게 된다.  

이러한 비판은 한용운의 텍스트 특히 소설 『죽음』을 통해서 구체성을 얻는다. 소설 『죽음』은 ‘조도전대학 문과를 나와 낭만주의 시인을 자처하는 정성열’에 대항하는 주인공 영옥을 통해 ‘자유정조’론의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 근대 전환기에 서구적 사랑의 감정은 열정적 파토스를 중심에 둔다면 『죽음』의 주인공 영옥은 서로에 대한 인격 탐색의 시기인 연애기를 거치고 그 결과로 결혼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소설 『죽음』의 서사를 ‘자유연애’와 ‘자유정조’의 담론 충돌로 해석하고 이를 『님의 침묵』의 ‘동양적 연애’와 연결하는 문화사 연구의 독법은 구체성을 얻는다. 

자유연애가 근대적인 사랑의 ‘열정’과 관련 있는 데 비해 자유정조는 전근대적인 ‘반려애’와 연결된다는 기존 문화사 연구의 입론과 달리 이번 연구는 낭만주의의 특징인 자유의지와 근대적인 사랑을 관련지어 논의하겠다. 자유의지가 근대성의 요소로 정립되는 데는 낭만주의의 아버지 중 하나인 칸트 철학의 역할이 컸다. 칸트는 “자유의지가 인간을 자연의 다른 대상들과 구별해준다” 그리고 “자유롭다는 것은 따라서 어떤 도덕적 가치들에 자유롭게 헌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유연애는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데 이는 이중적으로 볼 수 있다. 『님의 침묵』의 「군말」에서는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조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밧지 안너냐”고 한다. 한용운은 칸트와 량치차오를 따라서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유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을 지지한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현상적 자아가 좇는 ‘자유’는 자연필연성에 지배된다는 점에서 사실상 ‘부자유’일 따름이다. 진정한 자아만이 자연필연성을 초월하여 현상적 자아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자유롭게 법칙을 수립하고 스스로 그 법칙에 복종한다. 한용운과 그의 시대의 동아시아 지성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량치차오는 ‘자유’에 대해 상세히 논의한 바 있다. 량치차오는 공덕과 사덕을 나누어 공덕 편의 한 항목으로 ‘자유’를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아아! 오늘날의 청년은 누구나 시끄럽게 자유를 떠들어댄다.” “참된 자유는 반드시 복종할 줄 안다. 복종이란 무엇인가? 법률에 복종하는 것이다. 법률이란 내가 제정함으로써 나의 자유를 보호하고 또한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는 한용운의 시 복종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야요”라는 싯구에 영감을 주었다.  다만 복종의 “당신”이 량치차오의 “법률”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량치차오가 빠져든 국가주의의 경로를 이탈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용운의 시 「자유정조」는 자유연애의 자유(세속적 사랑)가 자유정조의 자유(진정한 정조)로 인도되어야 한다는 시적 사유를 표현한다. 이러한 시적 사유를 『죽음』 등의 소설에 대한 근대-전근대 담론의 충돌이라는 해석틀에 의해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연구는 「자유정조」 해석에 한용운의 비문학 텍스트 『불교유신론』을 중첩시켜서 문화사 연구자들의 주장의 주요 논거로 놓인 소설 『죽음』을 재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가겠다. 이렇게 볼 때 한용운의 시 「자유정조」는 자유연애를 자유정조로 인도하는 사상적 실천이라는 점이 드러나며 이는 칸트의 <자기애의 원리 논증>에 의해 정당화된다.     

<자기애의 원리 논증>

인간은 선하거나 악하다

도덕법칙을 최상준칙으로 삼은 인간만이 선하다.

따라서 ‘자기애의 원리’를 최상준칙으로 삼은 인간은 악하다.     

1920년대 자유연애 담론의 ‘자유’, 특히 소설 『죽음』에서 정성열이 실천한 ‘자유’는 이러한 ‘자기애의 원리’를 최상준칙으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용운에게서 자유연애 담론의 ‘자유’는 도덕법칙의 원리로 인도되어야 했는데 이를 한용운의 「자유정조」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행위를 준칙모델에 따라 설명한다. 준칙모델에 따르면 행위자는 욕구와 더불어 자신의 상황과 결단을 반영하여 준칙을 세우고, 그 준칙에 따라서 행위한다. 준칙을 세운 행위자는 자신의 준칙을 개별 상황에서 일회적으로 사용할 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상황에서 규칙으로 전범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칸트는 인간의 모든 동기는 ‘자기애’와 ‘도덕법칙’이라는 두 가지 동기로 수렴된다고 보았다. 자기애와 도덕법칙 중 자기애를 도덕법칙보다 우선시하겠다고 결정한 인격은 악하며, 도덕법칙을 우선시하겠다고 결정한 인격은 선하다. 악한 인간이란 ‘자기애의 원리’를 최상준칙으로 삼겠다는 근본 결정을 내린 자이다. 

칸트가 도덕법칙을 최상준칙으로 삼은 인간만이 선하다고 한 <자기애 원리 논증>의 두 번째 전제는 선의지와 도덕적 가치 논의로부터 정당화된다. 어떤 행위나 어떤 인격이 ‘선’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선의지를 지녀야 한다. 선의지를 갖는 것은 선하며, 선의지가 결여된 것은 선하지 않다. 따라서 비-도덕법칙을 최상준칙으로 삼는 인간은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다.

간략하게 살펴본 ‘자기애의 원리 논증’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타인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대할 것을 명령하는 ‘인간성 정식’으로 수렴된다. 선한 인간의 최상준칙은 도덕법칙이므로 그는 인간성 정식을 자신의 최상준칙으로 삼을 것이다. 반면 악한 인간은 자기애를 도덕법칙보다 우위에 놓는 최상준칙을 가질 것이다.

한용운의 시 「자유정조」가 당대의 자유연애 담론과 충돌한다면 그것은 ‘자기애의 원리’를 최상준칙으로 삼은 자유연애를 도덕법칙의 원리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기존의 문화사 연구는 ‘자유연애’가 근대적 연애 담론이기 때문에 이와 충돌하는 한용운의 시 「자유정조」와 『님의 침묵』을 잠정적으로 ‘전근대인 한용운의 표상’의 일부로 치부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근대 지성 한용운의 『불교유신론』 을 재검토해 보면 한용운의 시가 근대적 문제에 응전해온 칸트-량치차오의 사상을 전유하여 개조하고 있었으며 이는 『님의 침묵』의 중핵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근대인 한용운이 서양의 물질 문명을 인식하는 것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로는 무명 즉 현상적 자아에 얽매어 있는 “야만적 문명” 이라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한계 인식을 통해 진아 즉 미래의 도덕 문명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계기라는 점을 동시에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칸트 철학이 “존재 영역에 대한 이분법적 조망”으로 보는 폐해를 낳을 수도 있지만 “이 경계 설정을 통해서 인간적 실천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아포리아에 근접해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기반으로 하여 소설 『죽음』을 다시 검토해 보자.

소설 『죽음』에서 정성열은 “여자의 정조는 반드시 최초의 정식혼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가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든지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변치만 않으면 그것이 정조입니다. 그뿐 아니라 철학적으로 본다면 편협한 정조라는 것은 문제입니다.”라고 자유연애 사상을 제시한다. 이는 1930년대에 ‘정조가 취미라’는 나혜석의 주장을 선취한다. 이에 대해 주인공 최영옥이 “그것은 여자를 인격으로 보지 않고 기계로 보는 것입니다”라고 답변한다. 지금까지 문화사 연구는 이에 대해 자유연애론에 대한 전근대적인 거부의 혐의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 볼 때 최영옥의 답변은 자유연애 담론이 ‘인간성 정식’을 취하지 않고 ‘자기애의 원리’를 선택할 때 여성을 도덕법칙을 최상준칙으로 삼은 인격이 아니라 자기애의 원리에 속박된 기계로 만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용운의 삶과 사상의 일관된 근대지향성으로 볼 때 자유정조는 전근대적 ‘반려애’가 아니라 칸트의 ‘인간성 정식’에 근거를 둔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한 것이다. 

소설 『죽음』에서 최영옥이 ‘인격’ 대 ‘기계’를 대립시키는 것은 선의지를 따르는 초월(반성)적 자아와 자기애의 원리를 따르는 현상적 자아의 대립을 형상화하는 표현이었다. 그것이 『님의 침묵』에서 시적인 표현을 얻을 때 초월적 자아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한 ‘정조’인 ‘자유정조’로 나아가는 시 「자유정조」가 탄생한 것이다. 현상적 자아가 스스로를 초월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 “님을 기다리면서/괴로움을 먹고 살이 찝니다//어려움을 입고 키가 큽니다”는 싯구는 이후 ‘자기애의 원리’를 거부하며 초월적 자아로서 존재 역량을 길러낸 한용운의 중핵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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