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목적 - 우리는 왜 공부해야하는가? (1)
이 글은 다큐멘터리 영화 On the way to school(2009, 감독 Pascal Plisson)의 감상평이다. 문명의 혜택과는 거리가 매우 먼 장소에서, 모든 것을 수작업에 의존해야 하는 고강도의 육체적 노동이 생존의 필수이자 전부인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포스터 속 네명의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길을 촬영한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이 이미지속 가장 왼쪽의 인도남자어린이(Samuel)은 선천적으로 신체가 자유롭지 못하다. 제대로 된 휠체어를 살 돈이 없어, 플라스틱 의자를 개조된 수레같은 것에 조립하여 휠체어 대신 쓰고있다. 이마저도 매우 낡고 약해보인다. Samuel의 어머니는 아이가 보통의 사람들처럼 건강해질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무리해서라고 학교에 보내고 있다. Samuel의 두 남동생이 앞 뒤로 형의 휠체어를 끌고 밀면서, 편도 1시간 거리의 학교에 데려다 준다. 10살도 체 안되어 보이는 어린 두 동생이 힘겹지만 즐겁게 그리고 기꺼이 형의 휠체어를 끌고가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유일한 여자아이인 모로코의 Zahira는 걸어서 편도 4시간 거리의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나마 기숙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주중은 학교에서 주말은 집에서 보낸다. Zahira에게는 다시 학교에 가야하는 월요일이 가장 긴장되는 날이다. 4시간 거리를 걸어가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들도 인하여, 학교에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 이 소녀는 동행하는 학교친구들이 두 명 더 있다. 친구와 함께여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열두살 정도의 소녀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벅찬 여정이다. 말 그대로 산넘고 물건너 22km의 거리를 걸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Zahira의 가족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어린 딸을 열심히 학교에 보내고 있다.
미소가 아름다운 케냐의 흑인소년 Jackson은 여동생과 함께 걸어서 편도 2시간 거리의 학교를 다니고 있다. 세렝게티 초원과 같은 광할한 들판을 두 어린이가 한 손에는 책가방을 한 손에는 낡고 오래된 물통을 들고 걸어간다. 코끼리를 비롯한 위험한 동물들을 피해 숨어가기도, 길을 돌아가기도, 뛰어가기도 한다. 아이들의 부모님은 학교 가는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코끼리를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기도를 드리면서 자녀들을 교육의 현장에 보낸다.
Carlito는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소년이다. 목축업을 하는 부모님을 도와 양과 염소를 잘 보살피며, 말타기 실력이 뛰어난 아이다. 말은 Carlito의 중요한 통학수단이기도 하다. 이 소년은 여동생을 말 뒤에 같이 태우고 매일같이 학교에 가며, 학교까지는 말의 속도로 가도 편도 1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광활한 들판, 돌길, 넓은 강등을 말과 함께 열심히 달려가며, 중간중간 말이 쉴 수 있도록 멈추기도 한다. 학교 가는 길에 다른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 아이들도 Carlito처럼 말을 타고 있다. Carlito의 부모님도 아이들이 반드시 학교에 가아한다는 입장이며, 안전하게 지켜주는 부적과 같은 것을 말 안장에 매달아 주는 것으로 자녀들의 통학 길을 함께한다.
영화 속 네 명의 아이들과 부모님들은 왜 이렇게까지 여러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학교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학교에서 무엇을 얻길 혹은 배우길 바라는 걸까? 이 영화의 끝 무렵에는 아이들이 장래의망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Samuel의 꿈은 자신과 같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다. Zahira 또한 훗날 의사가 되어 아프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한다. Jackson의 꿈은 비행기 조종사가되어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것이며, 그 여동생의 꿈은 오빠가 어디가든지 함께 있는 것이다. Carlito의 꿈은 자신의 가족이 살아온 땅에서 가업을 이어가며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희망하는 삶의 모습을 선택하고 꿈꿀 수 있게 해준 곳이 학교일 것이다. 학교는 단순히 특정 지식을 쌓거나 사회적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학교를 통해 세상과 사람에 대해 더욱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하며, 현재 살고 있는 세계 너머와 소통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다양하고 넓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잘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이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며, 개인과 그 세상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가정교육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을 학교가 해줄 수 있다. 그렇기에 오지에 사는 이 네명의 아이들과 그 부모님들도 무리를 해서라도 학교에 열심히 가야한다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학교와 교육이 갖는 일반적인 의미를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여태까지 받아온 학교교육은 각자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왔을까?
대개의 경우 우리는 초, 중, 고등학교에서 특정 사회 또는 국가에서 원하는 자질들을 갖추도록 교육받는다. 하나의 문화권에 맞도록 제도화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단계의 교육은 선택이 아닌 의무에 가깝다.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해 사회화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교, 더 나아가 대학원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은 무슨 의미일까? 원래 취지대로라면, 특정 학문분야에 대해 더 깊은 공부와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심도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이치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는 역할을 해야하는 곳이다. 이 단계의 교육은 의무가 아닌 선택이며, 개인적으로는 지금껏 받았던 제도화 된 교육에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해야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현재 나는 미국에서 미술교육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에서 미술대학과 미술석사까지 마친 나는 굳이 왜 미국까지 와서 이 공부를 또 하고있나? 무엇을 기대하기에? 우선, 관심있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압축된 시간에 깊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온 것이다. 그동안 내가 경험해 온 미술과 미술교육의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왔다. 그리고 제도권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에, 사회의 제도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기관도 결국 제도이며, 이 제도를 통하여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제도권의 폭을 넓혀가고자 한다.
제도에 종속 혹은 통제당하기 보다는 나의 성장을 위해 제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지만, 우리가 제도권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우리 생각의 뿌리와 사고방식까지도 특정 제도권 내의 교육에 의해 이미 다 형성되어 있고, 여기서 벗어나는 또 다른 사유를 하고 세계관을 정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학에서 기존 교육기관의 학습내용을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보려한다지만, 역으로 대학이라는 또 다른 제도에 종속당하는 결과가 초래 될 수도 있다. 이처럼 학교교육이란 우리의 사회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육제도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무한한 사고의 폭을 제한하고 각기 독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일반화시키는 곳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학교'란 각각의 개인에게 또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 곳일까? 제도권 안에 있으면서도 제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물론 다양한 목적을 가진 학교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학교라는 제도와 역할에 대해 더 고민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