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와의 인터뷰-미술창작과 미술교육 간의 관계 (3)
E는 나의 대학 동기이다. 그는 정적이고 고요한 감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창작의 욕구와 에너지를 느린 속도로 한 겹 한 겹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다. 그에게 창작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경험들에 반응하는 일이다. 주변에 대한 반응속도가 다소 느린 듯 보이지만, 그는 신중한 태도로 내면 곳곳에 예리하게 뻗어있는 민감한 촉수와 같은 그 무엇들을 통해 하나의 자극을 다각도로 살펴본 후 결론을 도출한다. 나는 E가 가진 특유의 섬세하고 신중한 시선으로 본 미술의 창작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E는 대학교 때부터 다양한 창작의 소재에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해 왔다. 졸업 이후에는 학교에 다닐 때보다도 더 창작의 지평을 넓혀왔다. 미술과 같은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공연예술, 지역공동체와의 협업 작업등 나로서는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던 영역까지 아우르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특히 그중에서도 그는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를 통해 자신이 예술을 매개로 사회와 관계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나'라는 사람이 개인으로서 어떻게 사회인으로 성장해 가는지를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당시 그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이 컸었는데, 커뮤니티 아트를 통해 예술이 사회적으로 역할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목격하고 싶어 했다. 예술이 특정 사회집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특정 예술 작품이 자신에게 개인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하나의 작품과 개인 간에 이뤄지는 의미 있는 교환 자체가 예술의 사회적 역할로 충분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술교육은 창작보다 직접적으로 사람 간의 의미 있는 가치교환을 요하는 일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에게 미술교육은 창작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창작을 위한 수단 정도로만 여기기에는 교육이 사람 간에 갖는 영향력이 너무나도 크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이기에,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갖는 것 못지않은 책임감이 따른다. 또한 그동안 미술창작과 교육을 병행하며 두 영역이 서로에게 갖는 의미를 여러 가지로 느끼고 고민해 온 결과, 미술교육이 나 자신과 창작에 생각 이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E도 나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미술교육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아동미술, 성인 취미반 미술, 입시미술 그리고 방과 후 학교 등에서 미술을 가르친 경험들이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창작활동을 하는 데 있어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먼저,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방과 후 학교 미술교육은 E가 창작자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작가로서의 고민과 관심을 교육에 직접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의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으며, 학생들의 개별 관심사에 따른 작품을 창작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학생들의 작품을 지도하면서 E는 평소에 창작자로서 한 고민과 경험들이 생산적으로 적용되는 경험을 하였고, 이는 그에게 미술교육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관심사를 교육에 접목시키면서, E는 이것을 해야 하는 맥락과 이유를 학생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을 자신의 관심사대로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E는 특정 미술교육이 창작에 방해가 된 경험들을 얘기하였다. 그가 아동 미술교육을 하였을 때, 아동의 특성상 다양한 매체들을 짧게 맛보기 정도로만 흥미위주로 가르쳐야 했다. 이와 같은 창작에 대한 넓고 가벼운 태도는 자신의 작업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에너지가 쉽게 분산되어 하나의 것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그가 했던 입시미술교육은 사실적 표현 중심으로 가야 해서, 이미지를 한 가지 태도로 보는 데에만 익숙해지게 하였다. 물론 입시미술이 중점을 두는 방식과 자신의 창작의 방식 간의 거리를 둘 수 있었으나, 자신의 사물을 보는 관점이 획일화되는 경험이 유쾌했을 리는 없다. 나는 미술영재교육을 하면서 E처럼 미술창작과 미술교육 간의 시너지 효과를 느껴본 적이 있다. 영재교육은 입시가 아닌 어린 학생들의 창의성 발달을 목적으로 한다. 순수하게 미술 창작을 통한 사고와 표현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내가 창작자로서 미술 창작을 하며 고민했던 부분들을 수업에 활용하게 되었다.
미술교육도 결국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나의 고민, 관심사 그리고 경험들이 자양분이 된다. 그러나 창작할 때와는 달리, '나'의 것들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이며 왜 필요한가라는 문제가 스스로에게 납득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영재수업 당시 물성의 우연적 효과를 활용하여 형상을 만드는 수업을 주로 진행하였다. 이는 학생 각자가 알고 있는 구체적 사물의 형상과 이름의 관계 그리고 사물과 그 사물의 의미와 쓰임에 대한 관계들에서 벗어난 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탐구하게 하고자 한 수업이다. 물감, 마블링, 목탄 등과 물과 같은 용매를 활용하여 만들어진 형상들을 오려내고 이들 간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은 나의 창작과정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규정지을 수 없는 형상들이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또 다른 사건 혹은 이야기들이 발생한다. 이 수업은 스스로의 이해, 활자를 통한 언어적 사고, 그동안 학습받은 개념 너머의 것 혹은 세계를 탐구해가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이다. 또한 특정 재료와 그것의 물성이 가진 표현 잠재력을 다양하게 탐구해봄으로써, 학생들이 구사할 수 있는 시각언어의 폭을 늘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자신의 표현의 폭이 넓어짐과 동시에 스스로 만들어 낸 새로운 형상이 주는 신선한 충격에 흥미를 느끼고 창작 활동에 더 매진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내가 작품 활동을 하며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교육에 있어서도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또한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과 같이 진행하는 과정 중에, 나의 관심사에 대한 고민과 탐구도 더욱 깊어진다. 가르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에, 수업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은 창작자로서 나에게 지금 고민이 왜 중요한가를 다시금 정리하는 계기가 된다. 수업을 진행하고 결과물에 대해 학생들과 같이 대화를 할 때에는 나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관점이나 생각이 떠오르거나, 학생들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이 정도의 시너지 효과라면, 여러 단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미술창작과 미술교육을 병행하는 일이 나에게 갖는 의미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 어떤 거창한 이유가 더 필요할까? 물론 교육에 쓰는 에너지를 창작에 다 쏟아부을 수 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것 같다. 하지만 같은 에너지를 교육과 창작 양쪽에 동일하게 쏟아부었을 때, 어느 한쪽의 파급력이 더 클 것이다라고 누가 쉽게 판단할 수 있을까? 에너지가 쓰이는 과정과 결과에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창작보다도 교육이 창작자로서 더 창의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일이기도 하다.
E는 창작이 잘 안될 때, 오히려 미술교육이 창작의 근육을 지속시켜주는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그에게 두 영역은 분명 다르면서도, 창작자로서의 자신과 학생들이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 성장해가는 통로라는 점에서 같다. 그와의 인터뷰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이다. E에게는 미술이 나와 타인의 성장을 도모하는 수단이다. 그는 다르면서도 같은 이 두영 역을 잘 병행해 가기 위해서는 시간 분배뿐만 아닌 모드의 전환이 필요하고 한다. 특히 그가 창작 활동을 할 때에는 이에 맞는 감정선을 끌어내기 위해 작업용 플레이리스트를 별도로 듣는다. 그의 성향과 작품을 아는 사람인 나의 입장에선 쉽게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많은 예술가 교사들이 자신만의 병행 방법을 갖고 있을 것이다. 현재 나는 연구활동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어 교육과 병행할 방법을 당장에 찾지 않아도 되지만, 유학 전 모습을 떠올려 본다면 나만의 구체적인 분배와 병행 방법을 갖고 있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수업이 없는 날이면 작업을 한다 정도였다. E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추후에 두 영역을 잘 통합 시기면서 가기 위한 나만의 구체적 방법들을 세워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