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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꺽정 Dec 27. 2017

서문

과연 경제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국어사전에서 경제란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경제(經濟):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 나 용역을 생산ㆍ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


이 뜻풀이는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뜻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경제학 교과서중의 하나인 ‘맨큐의 경제학원론’에서는 경제학을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사회가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학문으로 정의하고 있다.  영어는 경제학을 Economics로 표현하는데 이 말은 효율적이라는 뜻에서 파생한 표현이다. 효율적이라는 것은 최소의 비용을 들여 최대의 이익(효용)을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즉 영어에서 말하는 경제학은 희소한 자원을 낭비 없이 사용하여 최대의 이익(효용)을 창출한다는 개념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이 말하는 경제학(Economics)과 우리말의 경제학(經濟學)은 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경제란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줄인 말이다.  과거 일본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시절에 Economics를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경세제민에서 ‘경’ ‘제’를 따서 경제학이라고 한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經世濟民의 뜻은 ‘세사(世事)를 잘 다스려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百姓)을 구(求)함’이다.  이는 서양이 생각하는 Economics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과거 동양에서 생각했던 경제는 단순히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일을 잘 다스려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생각하는 경제는 백성을 잘 살게 하자는 것을 목적을 둔 일종의 국가관리(통치) 행위이고 서양이 생각하는 경제는 단순히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작은 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큐의 경제학원론에 이런 말이 나온다.  ‘The word economy comes from the Greek word oikonomos, which means “one who manages a household.” 이 말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경제라는 것은 가정경제의 효율적인 관리가 그 시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생각하는 경제는 국가단위에 적용되기보다는 가계 단위 또는 기업단위에 보다 적합한 학문이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 사람이 Economics를 經濟學이라고 해석한 것은 매우 뛰어난 번역이라고 칭찬한다. 가계와 기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수준의 학문을 번역만으로 경세제민이라는 철학의 수준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순히 가계와 기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차원에서 경제학이 머물러서는 안 되고 경제학은 경세제민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라는 말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Economics를 경제학으로 번역한 것은 큰 실수하고 생각한다.  제목을 경제학으로 번역을 했다면 내용도 제목에 맞게 번역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을 것이고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 사람은 Economics를 번역할 때 그냥 말 그대로 최소비용학, 효 율학이라고 칭했어야 했다.  그래야 Economics의 내용과 제목이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가 Economics를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경제학이라는 용어로 번역함으로써 대중들이 경제학에 대하여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  경제학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기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범위에 국한됨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잘 살도록 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경제학의 뿌리는 경세제민을 다루는 커다란 담론을 다루는 학문은 아니다.


초기 경제학에서 다루는 이론의 대부분은 개별기업의 입장에서 만들어졌다.  즉 노동과 자본 기술을 결합하여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기업의 시각에서 이론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학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 국가 안에 있는 개별기업의 집합의 입장에서 이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경제학은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구분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개별기업의 입장에서 정립한 이론이 미시경제학, 개별기업의 집합의 입장에서 정립한 이론이 거시경제학인 것이다.  통신과 운송수단이 발달하면서 개별기업의 활동이 한 국가에만 한정되지 않고 국가 간으로 확대되자 국가 간 경제활동에 대한 이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국제경제학이다. 이와 같이 경제학은 경제주체의 확대 등으로 다양한 범위로 분화되고 있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근간은 경제학의 시각은 여전히 기업중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핵심사항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절약이 미덕인데 미국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라고. 이 이야기를 듣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절약을 해야 부가 축적이 되고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미국에서는 정반대로 소비를 해야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가 된다고 하니 선뜻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미국에서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다름 아닌 기업가의 논리에서 생겨난 말임을 깨닫게 되었다.  앞서 얘기한 대로 경제학은 기업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기업가는 물건을 생산하는 입장이기에 생산된 물건이 팔려야만 이윤을 남길 수가 있고 생존할 수가 있다.  만약에 생산된 물건이 안 팔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업은 망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특히 언론매체 등을 이용하여 소비가 잘되어야만 생산량이 늘어나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노동자를 많이 고용하게 되고,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을 받게 되고, 이러한 순환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사람들이 잘살게 된다는 논리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 말은 개인의 부를 탈탈 털어서 기업의 곳간을 채우게 하겠다는 흑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에 경제학이 경세제민을 추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은 절대로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얘기를 듣고 있다. 지갑을 열어야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과연 누구를 위하여 지갑을 여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학은 Economics에서 추구하는 기업 입장에서 효율성을 추구하여 부를 축적하는 미시적인 학문이 아니고 경세제민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철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철학이 없이 만들어지는 경제학은 백성을 위태롭게 하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막고자 하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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