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마음속에서 솟아 나오려 하는 그 무엇에 의해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왜 그것이 그다지도 어려웠을까...?"
40대의 헤세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쓴 데미안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던진 물음에 대해 헤세는 어떤 답을 내어 놓았을까?
<나는 내 부모님의 자식이었으므로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그러나 내가 눈과 귀를 돌리면 어디에서나 다른 것이 존재했다. 비록 그것이 낯설고 무시무시하더라도, 또 그곳에서 양심의 가책과 불안감을 얻게 되더라도, 나는 다른 세계에서도 살았던 것이다. p.16>
헤세는 어느 쪽의 삶에도 안주할 수 없는 경계인의 특성을 타고 태어난 듯하다. 편안하고 안정된 삶에서는 금세 지루함을 느끼고 또 막상 방랑길에 들어서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이중성을 보인다. 그러함에도 그는 끊임없는 자아 찾기에 도전한다.
"나는 나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러하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고, 그 길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며, 오솔길을 찾아가는 암시이다."
데미안이 청소년들을 위한 성장소설로 알려진건 저자인 싱클레어의 10살 때의 경험으로 책이 시작 되기 때문인 듯하다. 주먹 세고 덩치도 큰 프란츠 크로머라는 악당에게 괜한 허세를 부리다 덜미가 잡혀 영혼까지 저당 잡혔던 경험을 책의 전반부에 길게 풀고 있다. 데미안이 크로머로부터 그를 구원해 주지만 데미안은 또 다른 사슬이 되어 청년기에 이를 때까지 그의 영혼을 원래 그가 속했던 세계로부터 떠돌게 한다. 그러고는 결국 신과 악마의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새로운 신 아브락사스를 인정하게 된다. 데미안이 단순한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청년시절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 문구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아니, 오히려 더 절절하게 와닿는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 뒤에 이어지는 문구에는 불편한 마음도 없지 않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40대의 헤세는 여전히 불완전했을 것이다. 어쩌면 신 마저도 그가 생각하는 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실험적 객기가 발동하지 않았을까? 마치 10세 때 프란츠 크로머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 하더라도 운명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계인으로서의 헤세는 데미안이라는, 선과 악의 이중성을 지녔지만 그래도 이성적이고 멋진 인간으로서의 전형을 발견한다.
<나는 열쇠를 발견했다. 단지 어두운 거울 위에 몸을 굽히기만 하면,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어두운 거울 속에서 나 자신의 내부로 완전히 들어가기만 하면,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열쇠를..., 그러면 나는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데미안과 완전히 닮아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헤세가 마치 옆에서 들려주는 듯한 아래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본다.
"깨달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찾고, 그러한 자신 속에서 더욱 견고해져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향해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새 50대의 끝자락에 있는 지금도 내 마음 속에서 솟아나오려 하는 그 무엇에 의해 살아 가는 일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10년쯤 지난 뒤에는 어떨까? 그때 쯤이면 그래도 이 만큼 더 견고해지고, 또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