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파산 시대의 '알파메일' 생존법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잡아먹는 자와 잡아먹히는 자. 이 뻔뻔한 이분법을 좌우명으로 삼는 주인공 말라(로자먼드 파이크)는 법원이 지정한 '법정 후견인'입니다. 그녀의 직업은 홀몸 노인들을 '케어'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녀의 케어는 우리가 아는 따뜻한 돌봄이 아닙니다. 노인들을 요양원에 처넣고, 그들의 집과 자산을 합법적으로 경매에 부쳐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합법적 약탈'입니다.
이 영화는 묻습니다. "법과 도덕이 일치하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착한 양으로 늙어 죽을 텐가, 아니면 영악한 사자가 되어 남의 은퇴 자금을 씹어 먹을 텐가?"
개인심리학의 창시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를 '우월성 추구'와 '열등감 극복'으로 보았습니다. 주인공 말라는 이 아들러적 권력 의지를 괴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그녀에게 '심리 케어'나 '후견'은 타인을 돕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수단입니다. 그녀는 노인들의 무력함(열등감)을 먹고 자랍니다. 재미있는 건, 그녀가 스스로를 '피해자'가 아닌 '개척자'로 포괄한다는 점입니다. "여성은 세상에 당하고만 살 수 없다"는 식의 왜곡된 페미니즘 서사를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죠.
이것은 현대 자기계발 담론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네 마음을 다스려라, 그러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공감 능력이 결여된 소시오패스와 만났을 때, 어떤 재앙이 벌어지는지 영화는 똑똑히 보여줍니다.
미셸 푸코는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신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힘을 '생명관리권력'이라 불렀습니다. 영화 속 요양원은 이 권력이 가장 세련되게 작동하는 장소입니다.
말라는 합법적인 서류 한 장으로 노인들의 신체 자유를 박탈합니다. "당신은 판단 능력이 없으니 우리가 관리해주겠다"는 논리는 친절해 보이지만, 사실상 '사회적 사형 선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능력'을 상실한 노인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관리 대상(Object)'으로 전락합니다. NM(New Marriage)이 결혼을 외주화했듯, <케어링> 속 사회는 효도와 돌봄을 외주화했고, 그 틈새시장을 자본이라는 이름의 포식자들이 장악한 셈이죠.
영화는 말라가 하필이면 무시무시한 러시아 마피아의 어머니를 건드리면서 본격적인 블랙 코미디로 치닫습니다. 보통의 영화라면 마피아의 물리적 폭력 앞에 주인공이 굴복해야겠지만, 말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그녀는 '법이라는 방패'와 '자본이라는 칼'을 쥔 현대적 악당이기 때문입니다.
마피아가 총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말라는 법원 판결문으로 사람의 영혼을 말려 죽입니다. 누가 더 잔인할까요? 영화는 관객에게 묘한 당혹감을 선사합니다. 총을 든 마피아보다, 전자담배를 꼬아 물고 미소 지으며 노인의 집 번호키를 바꾸는 말라가 훨씬 더 소름 끼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결말부에 이르러 말라는 자신의 약탈 시스템을 전국 규모로 프랜차이즈화합니다. 이제 그녀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존경받는 기업가, '케어 산업'의 선구자가 됩니다.
이 지독한 냉소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당신이 공들여 쌓아온 커리어, 연금, 심지어 당신의 심리적 취약성조차 누군가에겐 '엑셀 시트 위의 숫자'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자본주의는 이제 우리의 노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노후와 고독'까지 수익 모델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늘의 인사이트]
"I care a lot(정말 신경 써 드릴게요)"이라는 말만큼 무서운 말은 없습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며 '케어'해주겠다고 다가온다면, 일단 당신의 인감도장부터 숨기십시오. 진정한 심리 케어는 타인의 손길이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을 자본에게 넘겨주지 않는 불굴의 의지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의지만으로 병원비를 낼 순 없겠지만... 최소한 내 집에서 쫓겨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