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관1. 아파트
[2화] 나는 몇 호의 주민이다.
그가 마주한
첫 기억의 조각은 아파트였다.
무려 서울에 있던 아파트였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높이 솟은 아파트.
회색빛 외벽, 나란히 들어선 베란다,
지금은 낡았지만
그때는 무척이나 번듯해 보였던 공간.
흠, 왜 아파트가 여기 있을까.
무얼 뜻할까.
아파트 사이에 문득 보이는
저 해맑은 표정은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단순한 생각의 파편들이 쏟아졌다.
아파트라…
•
그는 어릴 적
누군가의 아들이자 손자였고,
누군가의 친구였다.
골목길에서 그는 누군가의 무언가였다.
그때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바람결이 느껴지고,
담장 너머의 기척이 가까이 있었던 시절.
아파트를 보던 그는
그때의 그가 떠올라 혼자 싱긋 웃었다.
참 좋았지.
구름사다리에서 떨어져
붉은 꽃잎들이 흩날려도,
방긋방긋 웃으며 뛰어다녔더랬지.
재밌었다, 참.
하루종일 쏘다니며 동네를 휘젓고 다니고,
누군가의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누군가의 어머니에게 누군가를 찾아
같이 쏘다녔던, 참, 그랬던 그때.
골목이 가족이었던 그 동네.
그 시절엔
어른들이 다 부모였고,
아이들은 서로의 동생이었다.
•
아.
아파트에서 그는
단순히 몇 호의 주민이었다.
아파트에서 그는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몇 호의 주민, 그뿐이었다.
이름 대신 호수,
관계 대신 동호수로 정의된 자리.
흠, 그때부터였을까.
이곳에 박물관이 자리하기 시작한 때가.
잘 모르겠다.
무언가 빠져나간 듯한 감각.
자리를 잡으면서 잃어버리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
그가 아파트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파트는 몹시도 깔끔했고,
하얀 벽이었다.
다른 누구도 보지 못할,
나만 존재하는 벽.
그 벽 옆에 있는 인터폰이 울렸다.
띵동띵동.
“몇 동 몇 호 맞나요?
밑에 집인데,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
너무 시끄럽네요.”
그는 누군가가 아닌
몇 호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죄송합니다.”
라는 단편적인 대답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말았다.
그조차도
누구였는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나는 누군지 궁금해하지 않는 삶에
너무 오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그나저나
벨도 울리다니, 여긴 뭐지.
잠깐의 멍함과 황당함이 지나갔다.
그 순간의 위화감.
삶이 어딘가 엇나간 게 아니라,
그저 딱 맞게 끼워져 버렸다는 기시감.
•
그는 시선을 다시 돌려
아파트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벽 한쪽에는
그가 어린 시절 썼던 책상과 공책이 있었다.
와.
새 학기가 되면 샀던
하얀 공책들을 보며
그는 소회에 젖었다.
새 학기가 되어 교과서를 받아오면
교과서 겉에를 비닐로 싸주었던 이모,
엄마 손을 잡고 문방구로 가
공책을 바리바리 사왔던 그때가
생각이 났다.
그 시절의 준비는
조금 설렘과 조금 무서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도, 내 이름이 적힌 공책이 생긴다는 건
무언가 나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지금,
공책 위엔 이름이 없었다.
아파트에는,
그때 그곳이 아닌,
공책만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는 공책을 챙겼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내밀었을 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공책을 들고,
그는 조용히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