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문제는 어딜 가나 있는 법, 나 역시도 전날 늦게 귀가하는 통에 다른 차의 앞을 막는 일명 이중주차를 시연했다. 입주민의 전화를 받고 잠에 취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뒤통수의 말려 올라간 내 머리야 어떻든. 중립을 해놨는데, 밀어보지 않으신 것 같았다.
주차장으로 가 보니 남자한 분이 애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뒤에는 마치 제갈공명이나 들었을법한 부채모양의 나뭇가지를 손에 쥔 경비원 한 분과, 오며 가며 인사드렸던 중년의 부부가 차량의 보닛을 열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차량을 빼주지 못한 상태라 재빠르게 사과의 목례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후진기어를 넣고 이제 막 비게 된 주차라인 안으로 차를 집어넣었다. 차를 빼주기만을 기다렸던 운전자 분은 자신의 차량에 올라타더니 다른 차들 사이로 힘겹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죄송한 마음으로 그분의 후진을 돕기 위해 손짓을 하며 유도했다. 그렇게 하니 운전자 분은 창문을 열고 웃어 보였고, 그 웃음에 나도 밝게 웃으며 아까보다는 큰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를 세게 외쳤다. 아마 이 정도 급의 '죄송'태도 정도면 살면서 웬만한 풍파는 다 비켜갔겠지.
웃음은 하품 다음으로 전염성이 꽤 강하다. 먼저 웃는 이도 즐겁지만 따라 웃는 이도 마음에 잔잔한 고요가 생긴다. 가짜 하품을 해도 하품은 따라 하게 되어있다. 억지로 웃는 사람을 보고도 웃게 된다. 그런데 예민한 사람은 억지웃음을 골라낸다. 그래서 난 평소에 억지웃음이 안 되도록 얼굴 근육을 늘 풀어놓는다. 감정이 기분이 되지 않게 라는 책의 제목을 본 적이 있다. 순간적인 내 감정이 오늘 하루 전체의 기분이 되지 않도록 미소백신을 지속적으로 투여하는 게 나의 노하우라면 노하우랄까.
어쨌든 오늘도 어쩌면 마음이 상해버렸을 이웃님의 마음을 달래 드렸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아까부터 내내 작은 차 주변을 맴도는 세 분이 신경 쓰였다. 나뭇가지를 들고 차량의 배 부분을 간지럽히는 경비 아저씨와 연신 한숨을 내쉬는 아저씨, 울상이 되어 '여긴가? 여긴가?'를 내뱉는 아주머니. 90도 가까이 시원하게 열려있는 보닛.
'아! 차 밑에 들어간, 혹은 엔진룸에 있을 고양이를 찾는 거구나!'
출근 시간에 야옹이 때문에 애가 탈 중년의 부부가 안 되어 보여 접근을 해보았다. 비번날 가만히 못 있는 비번병이 또 도지나 싶었다.
(잉? 오늘은 나도 출근인데? 비번이 아니라고...)
"야옹~ 야옹~"
정확히는 "양~"에 가까웠다. 소리로 짐작 건데 이제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다. 소리를 따라 차 뒷부분으로 가니 차량하부에 몸을 웅크리고 아무거나 붙잡고 앉아있는 새끼냥이를 발견했다. 너무 어두워 플래시를 비춰보니 내 손 만한 어두운 색상의 작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무서웠는지 약 1초 간격으로 울고 있었다. 어찌나 깊숙이 잘 안착해 있던지, 고양이가 만약 탈옥을 꿈꾸는 거라면 이대로 아파트 정문도 무사히 통과할 것만 같았다.
나도 혹시 모를 감염과 안전에 대비해 트렁크에 있는 방어 10, 수집 8, 민첩 9짜리 목장갑을 꺼내 오른손에 장착했다. 비번병(?)이 있는 나는 트렁크에 항상 장갑과 소화기, 구급가방을 챙겨 다닌다.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상황에 대비해... 그런데 워낙 오지라퍼이다 보니 반창고가 은근히 잘 팔린다.
냥냥이가 놀라지 않도록 "괜찮아 괜찮아~ 무서웠지~ 아저씨가 도와주려는 거예요"라며 말을 걸며 구조를 시작했다. 딸아이를 낳고 난 이후로 나의 이런 닭살 돋는 말투가 점점 더 심해진 것 같긴 하다. 손을 쑤욱 집에 넣어 몸통에 살을 살짝 잡아 천천히 흔들며 달래며 꺼내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고양이는 내 뱃살처럼 지방층이 두껍지 않아 잘 잡히지도 않았다.
나의 애타는 구애 덕분이었을까. 바닥에 그대로 누워 차 밑에 손을 넣은 지 약 2분 만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행여나 다칠까 싶어 아주 조심스럽게 이뤄진 구조작업이었다.
"야옹"
조그마한 인형 같은 녀석이 내 오른쪽 어깨에 작은 발톱을 걸어 매달렸다. 아저씨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만족해했고 경비원 분은 고양이를 어디 두냐며 몇 마디 말씀하시다 바쁘신지 사라지셨다. 아저씨는 내 등을 말없이 털어주셨고 아주머니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제발 내 차가 없는 먼 곳으로 놔둬주세요' 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쁜 출근시간에 그렇게나 많은 에너지를 쏟았으니 말이다. 늦지 않으셔야 할 텐데,
어깨에 매달린 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이 녀석을 계속 위로하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사람 냄새가 많이 묻기 전에 안전한 화단에 내려놓기로 했다. 동물을 구조하다 보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입양할까... 좋은 주인을 만날까... 아니면...
화단에 내려놓으니 어미를 찾는 울음소리로 바뀌었고 세 발짝 '영차영차' 움직이더니, 그 자리에 멈춰 울기만 한다. 휴... 나도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속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꾹 참고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는데,
"꺄아악~!!!!!"
날카로운 여자 비명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그 고양이가 발견된 차량의 차주인아주머니였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 보인다. 손가락 네 개의 끝마디 전체가 이미 보닛에 끼어 보닛은 주인 마음도 모른 채 무심하게 닫혀버렸다. 보닛을 사정없이 닫아버린 아저씨는 아내분의 손이 있는지 모르고 닫아버리셨고, 황급히 레버를 찾기 위해운전석 문을 열었다. 아주머니를 진정시키며 보닛이 열리길 기다리던 그때 '딱' 소리와 함께 다시 열렸다.
아침부터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내가 만든) 민원, (오지랖 동물) 구조, (어쩌다가) 구급까지...
'화재 빼고 다 했네...'
아주머니의 손을 살펴보니 벌써 새까맣게 멍이 들었다.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당연히 안 괜찮다. 병원에 안 가보셔도 되겠냐고 여쭤봤지만 괜찮다며, 집으로 올라가셨다.
나도 출근 준비를 위해 집으로 올라가 밖에서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새끼고양이 사진을 보며 아내가 안타까운 말투로 내게 말했다. "우리가 데리고 올까?" 나는 "그러고 싶은데... 자신이 없어"라고 힘없이 대답했다. 새끼냥이나 강아지들을 데리고 와 책임 못 지고 유기된 현장을 많이 봐왔던 나였다. 아내도 동의했다.
"아주머니 손은 괜찮으셔요? 왜 고양이가 거기 있었던 거예요? 무슨 말씀 안 하시던가요?"
"아 손은 괜찮으신 것 같아요. 아침 출근길에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고양이들이 엔진룸 같은데 들어가는데 오늘도 그런 건가 봐요. 딱히 뭐 고맙다는 말씀은 안 하시고... 자기 차에서 멀리 떨어져서 놔두래서 그렇게 해주고 왔죠"
"네?"
"네.."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때론 침묵이 많은 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어미가 데려갈 거니까 멀리 두세요'라고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는데...
목적지에서 고양이를 차 밑에 달고, 아파트로 들어오는 길이었던 것 같았다. 출근길이 아니었으니... 하...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어미고양이를 찾아 울어대고 있을 새끼고양이를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고, 아무렴 어떠냐며 고양이를 방생하라고 명령하신 아주머니를 생각하니 속상하기도 했다.
대가를 바라고 도와 드린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손길을 내밀었을 뿐인데 약간의 허무함이 밀려와 풀이 죽는다. 그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아내가 위로한다.
"괜찮아요 여보. 좋은 일 했잖아요. 어서 가서 씻고 해요. 소시지 하나 구워 줄게요."
아내의 따뜻한 위로와 진심이 담긴 칭찬이 그 어떤 보상보다 달콤하다. 남자들은 칭찬에 약하다는데, 나는 더욱 그러하다. 가끔 칭찬해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참 단순하다.
제노비스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1964년 뉴욕의 한 아파트 앞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인이 강도들에게 수차례 공격을 당한 뒤 살해되고 만 사건이 있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신고하겠지', '내가 나서면 큰 일 날 거야'라는 생각으로 방관만 했었다. 이때 만들어진 신조어가 바로 '제노비스 신드롬'이다. 많은 대중들이 있으니 누군가는 신고를 해주겠지라며 스스로 합리화하며 아무도 나서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갖가지 글을 보자면 남을 돕다가 괜히 자기만 손해 보게 된다는 둥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아다닌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에 나가보면 '당연히' 받아야 할 도움을 받았다는 느낌으로 서 계신 분들이 꽤 계신다.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는 세상은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다. 화재 최성기에 도달해 뜨겁게 타 오르는 열기와 맞서 진압을 하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페트병과 종이컵을 들고 와 목을 축이게 해 주시는 시민도 있고, 심정지 환자를 급히 이송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아야 하는데 언제 오셨는지도 모르게 엘리베이터를 한 참 잡아주고 계시던 시민도 계셨다. 인도 위에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가던 길 멈춰 구급차가 올 때까지 할머니의 의식을 되찾게 해 드리려고 계속 주물러드리고 이름을 불러주시던 아주머니도 계셨다.
다들 무언가를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위험을 예상하고 물러선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소위 말하는 '차갑게 식어버렸다고 말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낸 '따뜻한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일 뿐이다. 경찰이, 소방대원이 와서 문제를 해결하고, 환자를 싣고 가면 그걸로 된, 그것을 바라보고 안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따뜻한 우리 주변의 이웃인 것이다.
나는 안전교육을 나가거나 시민들과 만나면, 지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저 사람이 나의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다소 부담스러운 메시지를 던진다. 식어버린 사회의 온도가 0.0001도라도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다행히 뉴스에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힘을 모아 차를 들어 올리는 시민들과, 터널화재에서 맨몸으로 화재를 진압한 시민, 물에 빠져 허우적 대던 아이를 발견해 구조한 사람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이고 있다.
출근을 위해 내려가서 보니 고양이가 아직 울고 있었고, 사무실에 도착해 다시 아내에게 다시 물어보니 이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고 했다. 어미가 정말 물어간 건지, 동네 꼬마들이 데리고 간 건지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고양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아저씨가 자기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
그래...
그거면 됐다.
온도가 0.00001도 오른 것 같다.
요즘 들어 단짝이 내가 나서는 것을 걱정할 때도 있다. 혹시 남을 도와주다가 다치면 어쩌나 싶어서다. 하지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지 않나... 솔직히 잘 안된다. 그냥 보면 움직이는 게 내 습성이다. 다만 일을 할 때는 조금이라도 조심하려고 한다. 아마 지켜야 할 식구가 생기다 보니 조금 조심스러워진 것도 같다. 그래서 심지어는 내가 좋아했던 축구를 할 때도 최선을 다해 뛰지 않는다. 발목 돌아가거나 십자인대 파열이 되는 동료나 환자를 종종 보거나 듣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나는 계속 선한 오지랖을 계속 떨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도 중요하지만, 이제 내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의 마음온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