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랭이 Nov 19. 2024

나는 다쳐도 너는 다치지 마

아빠와 하은이의 어느 주말 오후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있겠지?) 야간근무를 선 다음 날에는 꼭 사고를 치고 만다. 내가 소방공무원이 된 이후로 아주 자주 겪는 현 중에 하나다. 24시간 근무 후 바로 야간근무에 들어갔다가 퇴근한 오늘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상급기관의 평가를 앞두고 있는 아내는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 했기에 나도 서둘로 퇴근했다. 며칠 째 낫지 않는 감기와 잘 싸우고 있는 두 여자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빠른 퇴근과 함께 해 줄 수 있는 시간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작은 것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퇴근 후 나와는 반대로 출근을 해야 하는 아내를 배웅하고는 청소를 시작했다. 며칠에 걸쳐 안방과 거실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는데 문제는 창고와 하은이 놀이방이었다. 사실 놀이방을 가장 먼저 치워주고 싶었는데... 마음같이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의 전화 한 통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키랭이! 하은이가 놀이방 안 치웠다고 말했나 봐..."

 "응? 뭐라고?"

 "이거 봐봐"





청소와 정리는 할 때는 힘든데 치워져 가는 모습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다. 특히 실내장식물이나 가구의 배치를 바꿀 때 가장 즐거운데, 실사판 테트리스와 흡사한 창고정리는 그야말로 도파민 창고다. 벌써 4시간 째인 청소가 이제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간다. 이사 후 매일매일 신경 쓰고 있지만 계속 바쁜 스케줄 탓에 정리가 상당히 더뎠다. 하은이는 간혹 책을 읽어달라거나 같이 놀아달라고 했지만, 감사하고 미안하게도 떼를 쓰거나 하지 않고 잘 기다려준다.


오후 4시,


아내가 올 시간이 다 된 것 같았다. 이제 밥도 같이 준비해야 할 시간. 하은이는 늦은 점심을 30분째 먹이며, 청소를 이어나갔다. 아내도 같은 음식을 내어주려고 했으나... 아무리 봐도 국물 없이는 목이 텁텁해서 밥을 넘기기 어려워 보였다. 냉장고에 있는 콩나물을 꺼내 뜨끈뜨끈한 콩나물국을 대접하기로 한다.


새 집에서 처음 끓이는 콩나물국. 육수를 우려내고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양송이버섯과 마늘 두쪽을 찧어 우려내니 기분 좋은 향이 올라왔다. 그리고 모든 요리의 마무리 대파를 한 단 꺼냈다. 최근 이사 온 집 근처에서 처음 사온 대파 다섯 뿌리 중 하나인데, 모두 뿌리를 잘라 화분에 심어놓았다. '흐흐'


 썰려 나가는 대파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현란하게 칼을 움직이고 있던 그때 익숙한 손님 한 분이 다가왔다.


"아빠, 뭐 하고 있어요?"

하은이다.

"응~ 엄마가 오실 시간이 다 되어서 콩나물국 끓이려고"

인생 37개월 차 '왜' 병에 걸린 딸이 말했다. "왜 콩나물국 끓여요?

"아~ 엄마도 콩나물 좋아하고 아빠가 만드는 거야~"

"왜 콩나물국 만들어요?"

"엄마 주려고~"

"네~?" '네'라는 대답에서 끝을 살짝 올리면 대화는 일단 종결된다.


마법의 가루인 소고기 맛 다시다 1/4스푼 정도를 가미하고 소금 한 꼬집, 후추 한 꼬집, 그리고 콩나물까지 올리고 나니 꽤 그럴싸한 콩나물국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요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 줄 대파에게 숭고한 목례를 마친 후 끝 단부터 힘차게 썰어갔다.


"아빠, 아빠는 왜 콩나물 국 끓여요?" 아빠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상당히 좋아하는 듯한 하은이는 요리를 하고 있으면 계속 질문하거나 보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프라이팬이나 냄비, 식재료 같은 것을 만지거나 볼 수 있게 해 준다. 요리 과정도 이해하든 못하든 짧게나마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은 몸살기가 심한 데다 많이 지쳐 안아주지 못했다.


"음~ 아빠가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 콩나물국을 끓여주려는 거야" 보면 참 어색하고 오글거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아이는 수천, 수만 번을 들려주어도 아깝지 않은 귀한 문장이라 동화나 드라마 속 대사 같은 말을 자주 해준다.


"아빠는 엄마를 위해서 만들어주는 거야?"

"그럼~ 그리고 아빠는 하은이를 엄청 엄청 사랑하지요 ~"


'샥샥샥샥샥샥샥샥샥 (파 써는 소리)'


"아빠~~ 헤헤" 하은이가 사랑 고백을 받자 몸뚱이만 한 내 다리를 꽉 끌어안아 애정을 표현한다.


"하우나~~~ 히히히"   '샤샤샤샤샤샤샥' "하은,, 아,, 앗!!!!!!!"


하은이가 내 다리를 꽉 껴안다가 나도 모르게 균형을 잃고 파가 아닌 다른 것을 썰어버리고 말았다. 순간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은이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말이 없어졌고, 그 모습을 본 나 또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다쳐도, 아이가 상처받으면 안 돼!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애써 웃어 보였다. 꽤 많은 양의 출혈을 보이고 있는 손가락은 흐르는 물에 계속 흘려보내며 궁금해하는 하은이에게 설명했다.

"아빠 무슨 일이에요?"

"아, 아빠가 파를 썰다가 그만 실수로 손가락을 다치고 말았어"

"네에? 손가락이요?"

"응, 손가락. 근데 하은이가 있어서 아빠 괜찮아. 하은이도 칼을 꼭 조심해야 된다 알겠지?"

"네에~ 아빠"


계속 곁을 떠나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딸이 응급실 의료진들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해자 몽타쥬


 딸의 순수한 마음을 상처 입게 하기 싫었다. 희생이 당연하다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나는 살아가며 아이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야 하는 부모다. 훗날 내가 혹은 아이와 함께 성장해 이러한 상황이 다시 발생하더라도 나는 아이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괜찮아. 사랑해"라는 말을 기꺼이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오늘의 이 작은 에피소드는 앞으로 수없이 겪어야 할 일들의 소중한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인생 37개월 차 하은이는 아빠에게 오늘 '사랑'이라는 감정의 선물과 '희생'이라는 귀한 가르침을 선물로 주었다. 


새 살이 돋아나 상처가 아물 때 즈음에는

나 또한 지금보다 더 성장해 있기를,

이도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자라주기를


늘도 바라고

또,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쿄에서 울려 퍼진 '아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