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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랭이 Jul 30. 2023

조금만 도와드릴 수 없을까요?

소방관이 바라본 세상 <불의 교훈>

"아들 ~ 통화되나"

"네, 식사하셨어요?"


"아~ 그... 시간 될 때 컴퓨터 좀 봐줄래?"

"네네~ 내일 한 번 가볼게요"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아빠와 아들의 토크다)


아빠는 가끔 컴퓨터나 휴대폰을 사용하다가 잘 안 되면 전화를 주신다. 간단하면서 급한 사안은 사진, 영상을 만들어 처리해 드리고, 복잡하지만 급한 사안은 아빠를 아바타로 만들어 처리한다. 그리 급한 것이 아니면 방문서비스로 케어해 드린다. 방문서비스는 식사나 과일 따위를 제공받을 수 있어 가성비가 좋다.


대부분의 자식들이 그렇듯 나도 아빠나 엄마의 이런 IT 문의를 건성으로 받아들이거나 퉁명스럽게 처리한 적이 없지 않다. 아직은 많이 어리고 철없던 나의 10대 시절, 아버지는 소방서에도 컴퓨터가 들어왔다며 학원까지 끊으면서 열심히 익혔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초등학생이던 내게 물어오셨다. 다만 그때는 간단한 것이라 큰 문제가 없었는데, 검은 도스화면의 아래한글에서 윈도로 넘어가자 문제는 복잡해졌다. PPT를 다루시는가 하면 엑셀도 가끔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간단하지만 당신께는 조금 어려운 기능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었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생각밖에 안 하는 철없던 10대 시절에는 기분이 조금만 좋지 않아도 퉁명스럽게 고객(아빠)을 응대하곤 했다.


그러다 조금 크면서 아빠와 소주 한 잔 같이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아빠는 내게 이런저런 고민들을 가감 없이 털어놓으셨다. 수풀이 우거지고 포장되어 있지 않은 길에 잘 정돈된 오솔길이 생긴 기분이었다. 나의 고민도 한 짐 지고 걸어 들어가서 내려놓고 오면 홀가분한 그런 기분 좋은 길 말이다.


"너는 컴퓨터를 잘해서 좋겠다. 컴퓨터든 뭐든 지금 많이 배워놓아라. 나는 나이가 드니 컴퓨터가 잘 안 돼. 젊은 친구들을 못 따라가겠어."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도 사실 컴퓨터를 잘 활용하셨다. 다만 아빠의 질문들을 가끔 살펴보면, 의외로 단순한 문제에서 막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모리 카드에서 사진을 뺀다던지,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고 받는다던지 하는 건데, 익히고 나면 다시 잊어버리기도 하셨다.


"아들, 그리고 너는 나중에 회사에 들어가거든 네가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주도록 해라. 그게 같이 사는 거지"


라며 특히 어른들이 도움을 요청하거든 꼭 좀 도와달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겠다는 지금의 내 비전이 어쩌면 아빠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빠 엄마들의 소리 없는 도움 요청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요즘말로 '꼰대' 소리를 듣거나, 퉁명스럽고 불쾌한 응대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혹은 무시당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물어보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고 있었다.




지금도 소방서에서 어려운 작업을 하는 동료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면 즉각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도와준다. 가끔 내가 재미있어하고 나도 발전할 수 있는 엑셀 관련 요청이 들어오면 퇴근 후에나 주말에도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을 짜주기도 한다. 


하루는 밤 12시가 되어도 퇴근하지 않는 주임님 한 분께 먼저 퇴근한다고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새벽까지 해야 하는 작업이 남아 있다며 먼저 가라고 손을 저었다. 나는 뭐 좀 도와드릴 게 있냐고 여쭤봤는데, 아니라며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하지만 또 오지랖병이 발동되어 주임님 컴퓨터를 보았고 10분 정도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가방을 내려놓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파일을 받아 빠르게 작업을 해드렸고 주임님을 집에 보내 드릴 수 있었다.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선배들의 눈을 보면 아버지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스마트폰이 한창 보급되던 초창기에 통신사 직영대리점에서 근무를 했었다. 나와 같은 나이 대의 고객들도 새로 산 휴대폰에 적응이 되지 않는데, 40대 60대 어른들은 더더욱이나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고객들이 매장 문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궁금할 수 있고, 후에 들어올 질문까지 생각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설명을 드렸다. 고객이 집으로 가기 전에는 문 앞에서 꼭


"어머님 혹시 사용하시다가 모르시는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전화 주시거나 방문해 주세요"라며 인사말을 남겼다.


그러면 특히 50 ~ 60대 고객님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씀이 있는데,


"아... 전에 휴대폰 쓰다가 잘 몰라서 매장에 물어보러 갔는데, 자식들한테 물어보라고 하고 대충 알려주고 말더라고"


"알아서 공부해라고 하고 나가라던데..."


"나는 집에 애들이 다 서울에 있는데, 바빴다고 해서 물어볼 수가 없어"


"아들한테 물어보면 이런 것도 모르냐며 뭐라 하니까..."


"딸이 하나 있는데, 자기도 바쁘니까..."


대부분 이런 말씀들이었다.


마치 10대 시절 거울을 보는 듯한 말씀에 많은 찔림이 오기도 했다. 몇 번 이런 말씀들듣다 보니 더 이상 고객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러니 고객들을 한 데 오시게 해 앉아서 짧게 강의도 해드리고, 커피도 같이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고객과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사적으로도 자주 통화를 하다 보니 나를 싫어하는 관리자도 생겼다.

'너는 도대체 몇 시간 동안 이야기 하는 거냐?', '아예 살아라 살아', '야~ 네 고객 온다'라며 나에 대한 많은 관심을 드러냈었다.




특히 외국인 손님을 받을 때가 기억이 많이 난다.


국인 손님이 들어오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손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동 아웃이었다. 요즘처럼 좋은 번역기는 아니더라도 간단한 검색 정도는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지만, 대부분 물건을 사지 못하고 나가게 되었다. 그 흔한 케이스나 충전기도 말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 땅에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물건을 사지 못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점으로 갔다. 영어 8등급 고졸이 선택할 수 있는 책은 유치원생 수준의 영어회화 책이었다. GO~ WORK~ 이런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뭐라도 해야겠기에 한 달 동안 방 안에서 열심히 소리 질렀다. 그리고 매장에서 알게 된 외국인, 토익공부를 하는 친한 친구,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실제 계약이나 업무에 필요한 문장을 통으로 암기했다.


그리고 어느 날 외국인이 방문하게 되었을 때 실제로 물건 계약에 성공했고 이 사실이 주변으로 알려져 그때부터 외국인 손님은 내 담당이 되었다.


감사한 것은 고학력의 관리자가 내 문장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계속 확인시켜 주었다. "야, 네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겠다. 하하하하. 그냥  phone number. phone number 하면 되지 그게 뭐냐. 아츄유얼 뭐뭐??, 크크크"라며 나의 하찮은 발음을 흉내 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What your phone number, please?", "Can I take your phone number, please?"라며 유학파 친구에게 배운 문장 연습을 하며 익살스럽게 대처했다. 내가 쓰는 문장이 인서울 대학 나온 선배가 맞다고 알려주니, 학습능률은 끊임없이 올라갔다.



주변의 따가운 관심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실천한 결과 몇 달 만에 매장의 점장이 될 수 있었고, 외국인 관련 다양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훗날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매장 실적은 지역 내 톱권을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비결이 있다면 아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도우라는 아빠의 철학이 담긴 가르침 덕분은 아니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본다.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마음을 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테니까...




주말을 맞아 장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러 갔다. 장모님께서 한 달 동안 대학교 실습과정을 무사히 마치도록 도와줘서 고맙다며 밥을 사주고 싶으셨단다. 식사 내내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모셔다 드렸는데, 장모님의 말씀 한마디가 계속 마음에 거슬렸다. "나이 먹고 괜히 시작했나... 싶네..."


집에 와 아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내의 설명을 듣고는 가슴 한편이 또 저려왔다... 


실습기간 동안 매일 아침마다 전 날 실습일지를 제출해야 하는데 실습장 사무실에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단다. 이메일에 접속해 프린트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인데, 컴퓨터를 다루는 게 서툴다 보니 같이 실습을 받는 젊은 분께 부탁을 해봤다. 그랬더니 '제가 이거 매일 해줘야 돼요?'라며 거절했다. 며칠 전 우리 집에 프린터가 한 대 새로 들어온 것이 이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날 각자 앞으로 나와 소감을 발표하는데, 그분이 장모님께 못 할 소리를 하고 말았다. 

"... 나이가 많아 컴퓨터도 못 다루는 분도 계셔 조금 불편했지만..."으로 시작한 이 한 마디는 장모님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 꽂히고 만 것이다.


20여 일 동안 내 프린터를 뽑으면서 겸사겸사 옆에 분 것도 도와줄 수 있는데 뭐가 그리 어려울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분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자라온 환경도, 성향도 너무너무 다르다. 


다만 내가 아쉬운 것은 내가 걸어갈 때 겸사겸사, 내가 밥 먹을 때 겸사겸사, 내가 움직일 때 겸사겸사 조금만 배려해 주었다면, 같이 있는 내내 감사의 마음으로 서로 웃으면서 일을 할 수 있었을 테고, 헤어질 때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되어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지 않았을까.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가 행한 작은 배려가 상대를 웃게 만들고 그 웃음으로 주변의 공기는 따뜻해지고, 그 공기가 나를 감싸 내가 사는 세상은 행복해진다. 설령 차갑게 식은 공기가 낮게 깔려 내가 사는 세상 아래로 들어오더라도, 나로 부터 시작된 작은 불씨는 다시 차가운 공기를 데워 위로 올려 보낸다.


그렇게 내가 사는 세상은 식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확산되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도 '연소 확대'되어 그들의 세상도 따뜻하게 데워 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소방관으로서 살아가며 얻은 작지만 따뜻한 불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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