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저 사람 어때?"
1991년 겨울에 대학입학원서 접수에 차출되어 업무를 하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의 와이프와 동생 (지금은 처제)과 같은 지하철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때 지금의 와이프가 지금의 처제에게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그때 처제의 대답은 시크하게 'Not bad'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직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처제는 '저 남자 잡아'라고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당시는 얼굴만 아는 사이라 떨어져 눈인사만 했었습니다.
나도 홍양 (와이프 호칭임)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조교 모임에서 보면 내성적인 나(I)와는 다르게, 홍양(E)은 사람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성격도 밝아 보였습니다.
이러한 면 때문에 자꾸 눈길이 갔고, 자주 곁눈질로 보게 되었습니다.
일치하는 MBTI가 한 개도 없지만, 둘이서 공통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술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술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아주 많습니다.
대학입학원서 접수 업무를 마감하고, 조교들 회식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앉았습니다.
당시에 썸만 타는 사이라 가까이 앉기에 눈치가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같은데요.
한국 사람들은 그런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모임에서 결혼 안 한 비슷한 또래의 남녀가 있으면 당사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서로 엮어 줄려는..
회식하면서 '우리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진지하게 만나봐라' 주제로 모든 구성원들이 한마디 이상씩 하였습니다.
내심 좋으면서 주목 받아 부담스러운 자리가 되었습니다.
1차에서 술 좀 마시고, 2차로 노래방에 갔습니다.
서로 어색한 분위기에서 (조교들이라 모두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홍양이 1번으로 마이크를 들고, 노래방 책도 안 보고 바로 번호를 눌렀습니다.
자주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선곡은 하수빈의 ‘노노노노노’.
그 당시에 핫한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를 하수빈보다 더 춤을 잘 추고, 더 잘 불렀습니다. (적어도 내 생각엔^^)
여기서 난 콩깍지가 씌워진 것 같았습니다.
2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조교들이 굳이 홍양을 집에 데려다주라고 나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홍양은 멀쩡한 것 같았는데..
여하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홍양 집에 데려다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쩡한 것 같던 홍양이 택시를 타자마자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습니다.
나는 슬며시 홍양의 손을 잡았는데 홍양은 잠결에도 뿌리치지 않고, 팔짱까지 끼었습니다.
그때의 가슴의 쿵쾅거림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홍양이 정말로 잠이 들었는지, 잠든 척한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은 기억이 없다고만 합니다.
1992년 2월 밸런타인데이.
컴공과 학과사무실 여자 조교(홍양)는 화공과 실험조교인 나에게 초콜릿을 주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썸타는 조교 동료에서 본격적으로 연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에 와이프가 되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업어서 집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얼마 뒤에 처갓집에서 9시 통금을 선언하셨습니다.
억울합니다.
내성적이고, 생각이 많은 나(ISTJ)는 처갓집에 눈치도 보여 이제 그만 마시고 집에 가자 말했지만,
외향적인 즉홍적인 홍양(ENFP)은 '한잔만 더'를 외친 게 진실입니다.
지금도 말씀드리지만, 저는 절대로 먹이지 않았습니다.
홍양 스스로 마셨습니다.
ISTJ는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ENFP의 기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밥은 뺏어 먹어도 용서가 되지만, 술잔을 뺏는 건 용납이 안되더라고요.
이건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이에 술잔을 뺏는 건 금기 사항입니다.
우리는 2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까지 30여 년을 함께 했습니다.
앞으로 비슷한 세월을 함께 하겠죠.
이제는 와이프보다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단짝 친구라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