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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FP 아내와 ISTJ 남편이 사는 얘기

급포옹 당하다

by namddang

지난 토요일, 가족식사를 하기로 했다.

목적은 지난 5월 3일 처제 생일의 늦은 축하와 미국에서 온 조카 환영.

조카는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를 기다리는 중인데, 그 기다림보다 더 절실했던 건... 고등어구이, 순두부찌개, 제육볶음이었다.

결국 한식의 강렬한 유혹 때문에 짬을 내어 한국에 왔다.

사 후에는 한동안 한국에 올 수 없다고 한다.


홍양도 서울로 올라오고, 아들 역시 여친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가족이 될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은 눈치다.

그렇게 모두가 예약된 식당에 모여 건배를 하려던 그 순간 - 갑자기 한 아가씨가 나를 와락 안았다.

모두가 놀라 눈을 크게 뜬 순간, 나도 멍해졌다.

그 아가씨는 다름 아닌, 미국에 있는 우리 딸이었다.


한국에서 가족 식사 중 미국에 있는 딸을 보게 될 줄이야.

나와 홍양, 처제는 너무 놀라서 일순간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딸은 아들과 조카와 짜고는 우리에게 완벽한 깜짝 쇼를 준비한 것이다.


지난번 갓바위에서 기도한 덕분(?)에 딸은 취업비자를 받았고, 프로세싱에 들어가면 한동안 한국에 오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에 2주간의 휴가를 요청했더니, 돌아온 반응은 "1주만 다녀오면 안 될까?"였다고.

이에 딸은 "그럼 1주는 휴가, 나머지 1주는 수시로 재택근무로"라는 제안을 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단다.

마침 세금도 정산받아 항공권을 끊었느니, 참 알뜰하고, 계획도 완벽했다.

그 완벽한 계획의 하이라이트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들, 딸, 조카 셋이서 모의해서 우리의 동선을 공유하고, 타이밍까지 계산해 등장한 장면이었다.


딸은 지금까지 늘 한겨울이나, 한여름에만 한국에 왔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 맞이하는 5월의 한국이란다.

이번 주엔 나와 참치회도 먹고, LG 야구 경기도 보기로 했다.

그리고, 2주 중 1주는 엄마가 있는 울산에 가서 함께 지낼 예정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둘째가 홍양 뱃속에 있을 때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어 홍양은 제대로 먹지도, 태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딸은 태어나서 예민했고, 밤낮이 바뀐 채 자주 칭얼대며 우리를 꽤나 힘들게 했다.

그랬던 아이가 이렇게 잘 자라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당차게 밝히더니 미국 이모집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조카(이번에 온 그 조카)와 자매처럼 지내며 공부도 열심히 했다.

결국 미국 좋은 대학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아이들은 세 살까지 평생 효도를 다 하고, 미운 네 살을 지나 사춘기 이후부터는 '웬수'가 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둘째는 이번에도 어버이날을 맞아 나와 홍양에게 감사의 손 편지를 각각 써 주었다.

심지어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도 친구 만남을 자제하고, 우리와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얼마 전 아들과 야구 본 얘기를 했을 때, 딸이 말했다.

"나도 아빠랑 야구 보고 싶어."

"그래, 한국 오면 같이 가자."

그 약속의 날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이번 주에 딸과 함께 야구장에 간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함께 산 날이 많지 않았지만, 우리 가족은 그 이상으로 끈끈하고,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다.

오늘은 딸 이야기만 했지만, 사실 첫째도 잘 자랐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우린 가진 게 많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물려줄 건 없다.

하지만, 나와 홍양은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계속해서 화목한 가정을 보여주었다.

그 때문에 둘 다 '전업 자녀' 졸업을 유도했다고 믿으면서 큰 만족을 느낀다.


이제 나와 홍양의 바람은 단 하나다.

아이들이 앞으로 마주할 인생의 고비들을 건강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잘 헤쳐 나가는 것.

이제 그 모습을 우리는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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