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남
요즘 푹 빠져 있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이다.
전작인 '슬기로운 의사 생활'도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이번 시즌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갑자기 드라마 얘기를 꺼낸 이유?
바로 화제의 인물, 구도원 때문이다.
완벽남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매일 아침 4시 반에 출근하고, 생수병 라벨을 습관적으로 제거하는 '루틴남'이기 때문이다.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 이거 내 얘긴데?"
나 역시 매일 아침 4시 30분에 집을 나서 5시에 회사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커피 한 잔 들고, 자기 계발 시간을 갖는다.
6시에 사내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6시 30분부터 오늘 할 일을 점검하고,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
점심을 먹고 나면, 동료들과 1.5km 정도 산책을 한다.
산책 후에는 양치하고, 6분간 명상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쉰다.
5시 15분에 저녁을 먹고, 이후엔 남은 업무를 하거나 관련 자료를 읽는다.
8시경에 집에 도착하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근처 헬스장으로 향한다.
헬스장 출석률을 항상 기록한다.
등록 전 출석 목표는 30%였지만, 현실은 21%.
운동이란 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씩 출석률을 올리려 애쓴다.
헬스장에서는 LG 야구나 겨울이면 여자 배구를 보며 5~6km를 달리고, 근력 운동도 챙긴다.
그리고, 밤 10시에 기절하듯 잠든다.
이게 내 일상, 나의 평일 루틴이다.
주말엔 일주일 만에 보는 홍양과 한잔 하는 루틴이 있다.
제일 즐겁고 기다리는 루틴이다.
문제는 이 루틴에서 뭔가 하나라도 빠지거나 흐트러지면 괜히 찜찜하다는 점이다. 마음 한 구석이 간질간질 불편하다.
"이거 혹시... 강박 초기 증상인가?"
그 생각이 들자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다.
바로 1998년에 개봉한 잭 니콜슨 주연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 영화에서 잭 니콜슨은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 경계선을 밟지 않고,
항상 같은 식당, 같은 자리, 같은 메뉴만 고집한다. 집에 돌아와선 문 걸쇠를 위아래로 다섯 번씩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 솔직히 나도 그와 비슷하다.
문을 잠그고 꼭 한 번 더 확인한다.
가끔 확인을 못하면 다시 돌아가서라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월요일에 출근하면 사무실 책상 위의 먼지를 꼭 닦는다.
먼지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정신적으로 민감하다.
며칠 손대지 않은 물건이나 먼지가 쌓인 걸 보면 반드시 바깥에서 털어내야 한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으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인다.
회의든 기차역이든 늘 10~30분 일찍 도착한다.
여유롭게 일찍 도착하여 기다리는 게 마음 편하다.
그런 나를 보며 홍양은 늘 한마디 한다.
"또 벌써 나가?"
울산과 서울 기차 예매도 항상 같은 호차, 같은 좌석을 예매한다.
예매창이 열리는 한 달 전 오전 7시에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하고 그게 또 루틴이다.
이쯤 되면 루틴이 아니라 강박일지도 모르겠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루틴은 건강한 습관인 반면, 강박은 불안을 줄이기 위한 비자발적 행동이다.
루틴은 못 지켜도 '좀 찜찜'한 수준이라면, 강박은 '심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예를 들어 회식으로 일상생활 루틴이 흐트러져도, 다음 날 다시 루틴대로 돌아오면 된다.
'어제는 어쩔 수 없지."하고 넘길 수 있으면 루틴이다.
나는 그런 건강한 루틴으로 살고 싶다.
찜찜함은 감수할 수 있지만, 불안에 휘둘리며 살고 싶진 않다.
사람들은 "스무 살 넘으면 고치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꾸려는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영화 속 잭 니콜슨도 결국 강박을 이겨냈다.
중년이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주변의 관심과 사랑 덕분에 가능했다.
그리고 내 옆에도 있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 홍양.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도, 강박이 아니라 루틴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