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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FP 아내와 ISTJ 남편이 사는 얘기

응답하라 1982

by namddang

지난 4월, 중간고사를 앞두고 중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중 한 학생은 내 덕분에 성적이 50점에서 90점까지 올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기말고사 준비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또 한 번 작은 재능기부(?)를 하게 됐다. 오랜만에 만난 중학생들은 한층 자란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귀여웠고, 얼굴에 여드름이 더 늘어난 듯했다. 이번에는 개념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문제집 풀이는 숙제로 내주었다. 다음 주에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함께 풀어볼 예정이다.


그날 저녁, 홍양과 소주 한 잔을 하다가 문득 내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는 1981년, 그러니까 '응답하라 1988' 보다 더 오래된 시절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지하철 3호선 공사 붕괴 사고다. 당시 은평구에 살던 나는 독립문 근처 중학교에 배정되어 매일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지하철 3호선 공사가 한창이던 시절이라 녹번역에서 독립문역까지 이어지는 공사 구간을 매일 지나야 했다. 그러던 중학교 2학년 봄, 그러니까 1982년 4월에 (정확함을 위해 기록 검색함) 독립문 근처 공사장에서 철제 복공판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그 사고 때문에 시내버스 한 대가 그곳을 지나던 중 추락했다. 내 기억에 그날은 하교하여 버스 타고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발생했던 것 같다. 내가 조금 늦게 버스를 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때 사망하신 분들은 그 순간이 오리라 예상이나 했을까?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중2 때 출범한 프로야구다. 프로야구 원년 첫 경기에서 MBC 청룡 (현, LG 트윈스)의 이종도 선수가 연장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런 드라마틱한 승부 덕분에 프로야구는 단숨에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 그때 가장 인기 있던 스타는 단연 김재박 선수였다. 그는 그 해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한 뒤, MBC 청룡에 입단했다. 특히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보여준 '개구리 번트'로 더욱 유명해졌다. 8회 말에 역전으로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그 경기로 '약속의 8회 말'이라는 표현이 생겨난 계기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연유로 원년에 MBC 청룡의 팬이 되었고, 지금까지 LG 트윈스를 응원하고 있다. 원년 우승은 OB 베어스 (현, 두산 베어스)가 차지했는데, 아버지가 회사에서 가져오신 우승 기념 OB 맥주잔 파카글라스 세트가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일화는 중3 때 고등학교 원서를 쓸 때였다. 그 무렵 경기과학고등학교가 2기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쑥스럽지만 내 자랑을 하자면, 당시 나는 3년 내내 반장을 맡았고, 전교 5등 밖으로 밀려난 적도 없었다.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자연스레 과학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했지만, 담임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만류하셨다. 당시에 '과학고등학교'라는 명칭은 낯설었고, 나중에 실업계 학교로 바뀔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로 가라고 하셨다. 결국 몇 차례 상담 끝에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지금 결과론적으로 보면 당시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은 것 같다. 그 당시 2기 신입생 모집이라 관심도 덜하여 입학은 지금보다는 쉬웠다. 하지만, 우리나라 영재 교육 1~2위를 다투는 경기과학고등학교에서 나는 학업을 못 따라가서 중도에 자퇴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사춘기가 찾아와 방황을 시작했고, 중학교 때의 공부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창 시절, 어른들은 종종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이 참 좋은 때야."

그땐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얼른 어른이 되어 시험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이제 와보니 그 시절이 참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지금은 그 말씀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요즘 젊은 세대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바로 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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