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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FP 아내와 ISTJ 남편이 사는 얘기

아들

by namddang

결혼하고 거의 1년이 다 돼 가는 가을, 우리는 아들을 낳았다.

사실 아이는 결혼 3년 후쯤 가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획보다 조금 앞섰다.


당시 회사는 설 연휴에 하루를 더 쉬었다.

명절 인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집에서 온전히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면서 방심(?)을 했다. 칠 후, 홍양이 테스트기로 검사를 해보니 선명한 두 줄이 떠올랐다.

처음엔 둘 다 당황했다. 하지만 잠시 뒤에 서로를 바라보며 "축하해. 어차피 낳을 아기, 조금 일찍 와준 거니까 잘 키워보자."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임신과 육아에 관한 책을 사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정보는 오프라인으로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가장 잘했던 건, 매일같이 클래식, 뉴에이지 등의 태교 음악을 많이 들려 것이다.

덕분일까. 아들은 어려서부터 절대음감을 가졌고, 악기에도 재능을 보였다. 우리 눈에는 음악 천재가 태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그저 취미로 즐기고 있다. 부모라면 이 마음,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첫 출산 이야기는 작년 11월 브런치에 썼다.

임신 8개월쯤 되던 날, 우리는 삼겹살 부부와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새벽,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술이 덜 깬 채 급히 병원으로 향했고, 홍양은 분말실로 들어갔다. 나는 병원 접수를 마치고, 입원실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다 그만, 분만실 앞을 지키지 못한 남편이 되었다. 아들은 그렇게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미리 알았더라면, 전날 약속도 안 잡고, 조신하게 병원 갈 준비하였을 텐데....


세상에 적응할 준비가 안된 팔삭둥이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처음 본 아이는 정말로 작았고, 눈도 못 뜬 채 누워 있어서 마음이 안쓰러웠다. 황달까지 찾아와 며칠을 더 인큐베이터에서 지내야 했고, 홍양과 나는 3주 가까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아이인 데다 오랜 시간을 인큐베이터에서 보낸 터라, 홍양은 더 마음을 쓰며 아이의 영양을 챙겼다. 아들은 그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다.


그렇게 양가에 첫 손자가 태어났다.

특히 이모가 네 명이나 되는 아들은 너무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음악을 전공할지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취미로 남기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아들도 "음악을 전공할 정도의 재능은 아닌 것 같다."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그러던 중, 울산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중학교에 배정받는 일이 생겼다. 학교 평판도 좋지 않았고, 아들도 싫어했다. 고민 끝에, 한 달만 서울 이모 집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녀보자고 했다. 그 뒤 다시 울산으로 전학을 계획했다.

하지만, 아들은 서울의 맛(?)을 보고는 "서울에서 계속 다니겠다"라고 했다. 마침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다행히 처형과 처제가 정성껏 아들을 돌봐주었다. 사춘기 조카를 보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너무 감사하다.

우리에겐 툭하면 반항하던 녀석이, 기센 이모와 기운 센 이모 앞에서는 꼼짝도 못 했다. 눈앞에 있는 이모와 먼 곳에 있는 부모 중 누구에게 더 잘해야 하는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아들이었다.


아들이 군대에 갈 때도 나와 홍양은 함께 하지 못했다. 대신 처형과 처제가 훈련소까지 동행해 주었다. 훈련소 입소 후 첫 토요일 아침,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하더니 곧바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 겪는 낯선 환경에 대한 어색함, 그리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 같았다. 겨우 달래고, 안전하게 잘 지내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아들이 이제 정말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이모들의 정성스러운 보살핌 덕분에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공부도 그럭저럭 하며 대학을 마쳤다. 비록 본인이 욕심을 부려 삼수까지 하여 속을 조금 썩였지만, 지금은 대기업 2년 차의 어엿한 사회인이다.


그런데 아직도 처제 집에 얹혀살고 있다. 문제는, 나도 주말부부를 시작하면서 그 집에 함께 얹혀살고 있다는 점이다. 가끔 밥 사고, 술 사고, 이래저래 고맙다는 표현을 하긴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미안하다.


지난 일요일에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 기차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역에 나를 데리러 나올려나 하고 전화를 받았다.

"아빠, 조금 뒤에 여자친구랑 영화를 볼 예정인데 끝나고 집에 데려다주려고. 그런데 차에 기름이 없어. 주유카드를 식탁에 올려놔 줘."

"그래, 알았어."하고 전화를 끊는데 순간 웃음이 터졌다.

차도 내 차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회 생활하면서 이러한 뻔뻔함과 당당함도 하나의 능력이다.

재밌다.


아들아, 앞으로 인생에서 힘든 일이나 어렵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네가 훈련소에서 울면서 했던 그 전화처럼. 그런 건 언제든지 받아줄 수 있어.


하지만 말이지...

기름은 네 돈으로 넣어라. 나도 땅 파서 기름을 사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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