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I)
금요일 퇴근길, 차 안 온도계가 38도를 찍었다.
문자 그대로 숨이 턱 막히는 폭염이다. 그래도 그 순간, 나를 버티게 해 준 단 하나의 생각 - 이제 드디어 휴가가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휴가 첫날이다.
다음 주 일요일쯤엔 분명 우울해질 테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설렌다. 30회 이상의 휴가를 보냈지만, 첫날의 설렘은 여전히 똑같다. 이번 휴가는 제주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번 휴가의 테마는 힐링과 운동이다.
사려니 숲길과 산굼부리길을 걷고, 조깅과 운동으로 휴가를 보낼 예정이다.
그리고 하루 한 편씩 글을 쓰고, 최소 30분 정도는 책을 읽는 루틴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홍양에게 하루에 1~2시간은 각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짧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존중의 시간이다.
해남 처가에서 하룻밤 묵은 뒤, 진도항에서 산타모니카호에 차를 싣고 제주로 갔다.
산타모니카호는 국내 제주행 선박 중 가장 빠른 쾌속선이라던데, 속도만큼 진동도 만만치 않았다. 홍양은 두 시간 내내 멀미에 시달렸고, 나는 업무상 배를 자주 탔기 때문에 "이 정도야 뭐" 느낌이었다.
돌아올 땐 조금 느리더라도 완도행 배편으로 바꾸기로 했다. 완도행 배는 크고, 속도가 조금 느려 흔들림도 덜할 것 같아서다.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다.
제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간 곳은 제주 국립 박물관이었다.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지만 늘 일정이 맞지 않아 미뤄왔던 장소다. 드디어 홍양의 동의를 받고, 이번에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제주에 나빌레라"라는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곳에서 나비에 진심이었던 생물학자 "석주명"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거의 모든 나비에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특히 전시장에 붙어 있었던 인상 깊었던 문구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나비 그림을 남긴 조선의 서화가 남계우, 그의 그림에서 37종의 나비를 판별해 낸 생물학자 석주명, 백 년을 사이에 둔 두 대가는 나비 그림을 통해 마주했다."
과학과 예술, 시간을 초월한 만남을 기획한 제주 국립 박물관의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시대에 나비와 그림에 몰두했던 두 사람. 그들의 부인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두 분의 열정은 인정하지만, 당시 그걸로 쌀을 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석주명 학자는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후세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그만큼 그의 개인사는 고단했을 것이다.
전시를 보면서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밖에 조선 후기에 지방관들과 제주 토호들에 의한 수탈과 육지로 진출 금지령으로 고된 삶을 살아야 했던 제주 사람들 얘기가 있었다. 지금이야 아름다운 관광지이지만,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고 강제 노역이 있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제주였다.
예전에 탐라국이라는 독립 국가였으나, 조선에 의해 강제 합병되었고, '탐라'라는 이름도 '제주'로 변경되었다.
제주 관점에서 보면 나라도 뺏기고, 이름도 뺏긴 슬픈 역사가 있는 셈이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났다. 하와이도 제주와 비슷한 역사가 있는 걸로 안다. 이 두 개의 화산섬 역사를 비교 평가하는 연구도 재미있을 듯하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미 했었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제주에서 걷기와 힐링, 운동과 휴식의 순간들을 담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