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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FP 아내와 ISTJ 남편이 사는 얘기

휴가(II)

by namddang

휴가 마지막 날, 일요일 저녁이다.

지난주, 휴가 시작하는 날에 "휴가 마지막 날엔 분명 우울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덜하다. 나름 알차게 보낸 덕분인 것 같다.

이번 휴가의 테마는 힐링과 운동이다. 매일 걷고, 운동하고, 글을 썼다.


김녕 해수욕장에선 아이스커피와 함께 비치 의자에 앉아, 발끝으로 고운 모래를 느끼며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봤다. 마침 해도 구름 뒤에 숨었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었다. 나와 홍양은 그냥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사려니 숲길은 비와 함께 걸었다.

제주 날씨는 정말로 변화무쌍했다. 숙소를 나설 땐 맑았는데, 숲길에 가까워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다.

빗속의 숲은 어둑했고, 스산한 느낌이 있었다. 마치 산신령이 나타날 듯한 분위기다. 실제 사려니도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라 왠지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나와 홍양은 빗줄기가 세질 때는 우산을 펴고 걷다가, 약해지면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걷기도 하였다.

중간에 오솔길 입구 표지판을 봤지만, 그냥 넓은 임도로 걸었다. 솔직히 말하면 뱀이 나올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빽빽한 나무 사이, 풀로 덮인 좁은 오솔길에서 뱀이 불쑥 나오면 피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반대로 산굼부리는 해를 피할 길이 없어 올라가는데 꽤 고역이었다. 사진 찍기엔 좋은 경치였지만, 숲길이 거의 없으니 땀을 엄청 흘렸다.


한적한 표선 바닷가 올레길은 달랐다. 해가 있어도 맑은 공기에서 부는 바람과 탁 트인 바다, 하얀 파도 소리가 걷기에 맞춤이었다.

멀리 '해녀식당' 간판이 보였다.

경치 좋은 곳에 있으나, 가까이 가보니 문을 닫은 지 오래된 듯했다. 한때 해녀는 낭만적인 직업이라 생각했지만,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와 제주국립박물관에서 그들의 고된 삶을 봤다. 그러면서 폐가에 가까운 '해녀식당'이 다시 한번 그분들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했다.


나와 홍양은 걷는 걸 좋아한다.

이번 휴가 동안 매일 6km 정도 걸었다. 숙소로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각자 시간을 보내며 나는 글을 썼다. 이러한 시간 가짐으로 예정대로 글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휴가 기간 동안 나와 홍양이 절대 빼먹지 않은 일정이 하나 있었다.

매일 저녁, 제주의 좋은 안주에 한잔하기.

지난 금요일부터 어제 토요일까지 9일 내내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은퇴하면 제주 일년살이를 해보자"라는 약속에 잔을 부딪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최소 4번은 한라산을 꼭 올라가자"며 서로에게 한라산을 따라주고 또 건배하였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백록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주말부부라 이미 조건을 충족하기 때문에 백록담을 볼 수 있다며 또 잔을 부딪혔다. 취중에 엉뚱한 결론이었지만, 제주에 다시 온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휴가는 그렇게 끝났다.


(추신 1)

추천하고픈 식당이 생각났다.

표선에 있는 '춘자 멸치 국수' 식당이다. 춘자는 식당을 운영하시는 할머니 이름이다. 6인 테이블 2개와 벤치 의자 4개인 작은 식당이다.

10여 년 전에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나서 이번에 다시 찾았다. 간판과 메뉴는 그대로, 가격만 천 원 올랐고, 콩국수가 추가되었다.

멸치 국물에 쏭쏭 썬 쪽파와 다대기 한 스푼이 올라간 단출한 냄비국수, 반찬은 깍두기 한 접시가 전부다. 맛은 여전했다.

할머니 사장님이 오래 건강하시길 바란다.


(추신 2)

돌아올 땐 조금 느리더라도 완도행 골드스텔라호로 바꾸었다. 산타모니카호보다 크고, 파도도 잔잔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덕분에 홍양도 멀미 없이 편히 올 수 있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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