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vs 추상능력

by 비움

암기력


중·고등학교 시절, 반에 한두 명은 꼭 있었던 친구들.

놀 건 다 놀면서 유독 성적만 나오면 나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친구

같이 있으면 즐겁지만, 질투와 미움이 동시에 드는 부류.


질투와 승부욕 속에서 그들을 관찰하고 분석했던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모두가 ‘암기력’이 비상하다는 것.

이때의 작은 경험은 나만의 편파적 공식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머리가 좋다 = 암기력이 좋다 "


대학 입학 후, 교양수업에서는 이 간극을 더욱 많이 느꼈다.

그들은 관심도 없는 과목을 통째로 외워 A를 받아갔고,

장학금이라는 것은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부러움을 넘어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런 경험들은 내 자격지심의 근원이 되어 있었다.

‘암기’라는 단어만 들어도 자신감이 급락하고 위축되었으며,

사람 이름조차 외우는 것을 어려워했다.


일본에서 취업하고 배우기 시작한 일본어는 더욱 큰 장벽으로 다가왔다.

몇 번을 들어서 외워지지 않는 일본어.

암기가 안되니, 언어 습득 속도는 늘 제자리

대화하는 것을 점점 더 두려워했다.

이 모든 것은 '암기'에서 시작되었더라.




감각으로 이해


내 기억력은 왜 이 모양일까?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일본어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어버렸고,

진심으로 이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할 때의 내 느낌과 감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해감되지 않은 조개를 먹었을 때를 떠올려보자.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가?

이 사이에 씹히는 모래, 비릿한 바다내음.

결국 ‘조개를 먹었다’는 사실은 잊고,

불쾌함과 짜증만이 남는다.


대체로 내가 경험을 기억하는 방식이 이와 닮았다.

나는 사실보다는 감정을 기억한다.

기억력이 좋은 친구들은 '해감되지 않은 조개를 먹었다'는 사실에 집중해서 기억한다.

그에 따른 불쾌감과 짜증은 '부차적'인 일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에 느낀 '불쾌함과 짜증'이라는 감정을 우선 기억한다.


여기서, 감정이라는 것은 에너지와 용량을 굉장히 많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만약 모두가 100GB 뇌의 저장 용량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데이터를 몇 배로 부풀려서 욱여넣고 있는 셈이다.

즉, 비효율적인 사고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스토리텔링의 최강자


그런 내가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 하나 있으니, 스토리 텔링이다.

내가 스토리텔링의 힘을 제대로 느껴본 것은 정확히 '재수를 하면서 본 수능'이었다.


나처럼 암기력에 자신이 없는 사람을.

암기능력이 가장 많이 필요한 세계사와 근현대사를

전부 1등급을 맞게 하는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입시강사'


노량진에서 종합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주과목 (언어, 영어) 쪽은 스타강사들에게 배울 기회가 없었지만,

사회과목은 꽤나 잘 가르치는 강사였다.


근현대사 1976년 강화도 조약부터

2000년대 김대중 정부시간까지 A4 3장 분량을

하얀 백지에 전부 적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적을 수 있었던 것은

한 편의 소설을 읽었고, 맥락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외우는 것이 괴로운 것이 아닌

사건의 전후사정에 대해서 알게 되니

암기가 아닌 '연결'이었다.

그것은 지루함보다는

한 편의 즐거운 소설책을 쓰는 느낌과 같았다.



기억력 대신 얻은 추상능력


그래서 짤막짤막하게 여러 개의 생각을 한 번에 연결하는 일들을 자주 한다.


일본어를 예를 들면,

[ 下請け(시타우케) — 하청업체라는 단어가 있다.

한자를 보니, ‘밑에서 받는다’는 뜻인데,

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받다 = 버티는 힘이 좋아야 한다.

밑에서 위로 던지는 것은 어렵다 = 일이 쉽지 않다.

위와 아래는 기본적으로 동등하지 않다.

그리고 하청업체가 아닌 '협력업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

パートナー 혹은 協力取引先을 써야겠다.]


나는 이걸 한 세트로 기억해 버린다.

이와 동시에 다른 능력이 생겼는데, 바로 '추상능력'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보면서 공통점을 찾고 혹은 다른 점들을 찾으면서

나만의 결론을 내고 또다시 이어 붙이기를 하는 능력인데,

사실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에디톨로지'의 저자 김정운 작가의 말이다.

기억력이 떨어지면 반비례로 '추상능력'이 올라간다.

2025년. 30년 가까이 고민하던 내 능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