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장에서 내장, 그리고 정신건강

by 비움


외장의 아픔, 내장의 침묵


앜. A4 용지를 정리하다가 슥—


손끝이 베였다.

그 순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가는 듯했지만,

곧 검지 끝에서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왔다.

그제야 기분 나쁘게 아려오는 통증이 밀려왔다.

별일 아닌 상처인데도 온종일 신경이 쓰인다.

물 한 잔을 들어도, 키보드를 두드려도,

그 작은 상처는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라며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든다.

왜 우리 몸은 덜 중요한 부위일수록 이토록 요란스럽게 아픈 걸까?

피부는 작은 상처에도 금세 경고를 보내며 난리를 친다.

아무 일 아닌 듯 지나치려고 해도, 몸은 “위험하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울린다.

하지만 이런 외장의 통증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


어렸을 적에는 어른들은 통증을 잘 못 느낀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집어 들고,

할머니의 손가락엔 웬만한 가시쯤은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

지금 와서 새삼스레 느끼지만,

반복된 자극과 세월이 감각 무디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살아가며 반복된 통증을 견디는 힘을 만든다.

이것이 외장의 아픔이다.


하지만 내장은 다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상해도, 심각해지기 전까지는 아무 신호도 없다.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으니 우리는 방심한다.

그러다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순간—

그들은 대처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친다.

이것이 내장의 아픔이다.


내장의 아픔은 ‘경고’가 아니라 ‘결과’로 찾아온다.

내장형의 고통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총합으로 찾아오고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얼마나 움직이며,

어떤 태도로 삶을 대했는지가 그대로 쌓여 나타난다.

조용히 쌓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두드린다.


그때가 되면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다.

잘잘못을 따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어른들이 말하던 ‘진짜 아픔’—

그건 대부분 이런 내장의 아픔,

조용히 자라나 결국 자신을 덮치는 그 침묵의 통증이었다.






외장과 내장의 경계


그렇다면 외장과 내장은 어디서 갈리는 걸까?

우선은 누가 봐도 외장인 피부를 따라 손가락을 쭉 따라가다 보면,

입과 코, 그리고 항문 같은 ‘입구’에서 멈춘다.

여기서부터 애매해진다.

손가락이 닿지 않으니 내부 같지만,

의학적으로는 이곳들 역시 여전히 ‘외장’이다.


흥미로운 건, 입에서 시작해 식도와 위장, 대장으로 이어지는

그 길고 복잡한 통로 또한 모두 외장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몸속 깊은 곳에 있어도, 결국 바깥세상과 직접 이어진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닭볶음면을 먹고 속이 타들어갈 때,

탄산수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얼얼할 때 느끼는 자극도

사실은 내부의 고통이 아니라 외장이 보내는 신호다.

우리 몸의 바깥은 생각보다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의학이 말하는 진짜 내장은

십이지장, 췌장, 간, 폐, 심장 같은 장기들이다.

이들은 웬만한 손상으로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대학 시절 술을 마신 다음 날,

“아… 간이 아프다”라고 말하던 친구들의 말은

사실상 틀린 표현이다.

진짜 간에 통증을 느꼈다면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일 테니까.

중요한 부위일수록 조용하다.

오히려 덜 중요한 곳일수록 요란하게 소리친다.

우리의 몸은, 필요한 만큼만 아프다.





외장에서 내장, 그리고 정신건강


내장의 신호를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인간은 또 다른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정신건강이다.


정신의 아픔은 은닉형이다.

눈으로도 보이지 않고, 귀로도 들리지 않는다.

이 아픔은 주관적이고,

밖으로 드러내는 순간 ‘치부’가 된다.


과거에는 그것이 병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저주’나 ‘광기’로 낙인찍히며, 비난과 외면만이 돌아왔다.

모두가 알아차릴 만큼 완전히 무너졌을 때,

그제야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가장 중요한 컨트롤 타워, 즉 뇌가 망가졌다는 증거였으니까.

그걸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눈에 띄게 망가진 이후에 캐치할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정신건강 문제가 유독 두드러지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몸보다 머리를 쓰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몸을 많이 쓰는 집단의 하루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하루를 살았다’는 감각이 남는다.

고단하지만 명료하다.


반면 머리를 쓰는 직업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몸은 앉아 있고, 머리는 과열된다.

하루가 끝나도 뭔가 허전하다.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불협화음.

그래서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야 한다.

운동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정신의 균형을 되찾는 장치다.


이제까지의 인류는 야생동물로부터 생존을 위해 뛰었고,

음식을 구하기 위해 몸을 사용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기 위해서 몸을 사용하고,

제대로 살기 위해 기꺼이 돈을 주고 몸을 움직인다.





집냥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고양이를 키우는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길고양이를 데려와 깨끗한 환경에서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길 위에서 고작 7~8년을 살던 녀석이 실내로 들어오면 15년, 길게는 20년까지 산다.


‘실내’로 들어온 순간, 고양이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위해 생각할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일?

그렇게 우리는 뚱냥이,

관절염이 생기고 둔해져 버린 고양이를 보게 된다.


지금의 인간은

깨끗한 집 안에서 사는 길고양이의 다음 단계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싸울 필요가 없으니 대신 비만과 관절염에 시달리고,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생존의 문제를 넘어선 존재의 피로.

우리는 생명으로서의 긴장을 잃은 채, 이제는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유”를 묻는다.


존재와 행복에 대해 고민하는,

관절염에 시달리는 고양이를 상상해 보자.

쥐를 잡기엔 너무 둔해져 버린 몸.

그래서 시간을 내 러닝 크루를 만들고,

잃어버린 유연성을 찾기 위해

요가 수업을 다니는 고양이.


웃기지만,

이것이 지금 우리 인간의 초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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