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놀이터

잃어버린 어른들의 놀이터를 찾아서

by 비움

내가 들어갈 틈


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고, 희열감이 차오를 때는 언제나 같다.

‘내가 들어갈 틈’이 보일 때다.


예를 들면, 일론 머스크를 볼 때 어떤생각이 드는가?

나의 경우엔 질투보다는 경외가 앞선다.

(미리 말하지만, 질투가 든다면 그 욕심과 시야에 박수를 보내고 싶고 응원한다.)

그가 세운 테슬라나 스페이스X를 보며 “와, 대단하다”는 감탄은 하지만

‘그 안에 내 자리가 있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 세계에는 내가 들어갈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완벽하게 맞물린 톱니바퀴들 사이에서 나는 오히려 숨이 막힌다.

본능적으로 느낀다 — 저긴 내 자리는 아니라고.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는 이런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다.

“내가 해도 저것보단 잘하겠다.”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입이 많아진다.

불평, 평가, 비판이 줄줄 흘러나온다.

"나라면 저렇게 안하고 이렇게 할텐데..."


이건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생겼다는 신호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거 해볼만 할 것 같은데?’

그 생각을 조금만 더 진지하게 밀어붙이면

그 안에서 아주 주체적인 나를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실패가 따라올지라도 나는 오히려 자유를 느낀다.


경외는 취미로 경험하면 된다.

테니스를 치는 내가 페더러를 보며 느끼는 감정처럼,

그건 그냥 ‘존경의 관람’이다.

즐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 있다면,

그건 다르다. 그건 나에게 전달된 신호이다.

그 감정이 떠오르는 순간, 한번만 적어보자.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그 문장 안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그건 남이 만들어준 세계가 아니라,

내가 주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세계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의 경계는 이 ‘틈’에서 갈린다.

좋아하는 일은 남의 세계를 바라보는 경외 속에서 태어나지만,

잘하는 일은 내가 직접 뛰어들 수 있는 틈에서 자란다.

나는 그 틈을 찾을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가장 선명하게 느낀다.




AI가 만든 새로운 놀이터


예전에 내가 경외심을 품었던 일들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장벽 뒤에 있었다.

그 벽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어디가 끝인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그 벽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벽의 문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그곳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감각이 조금씩 생긴다.

이 변화는 단순히 세상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 많은 콘텐츠가 쏟아지고, 너무 많은 도구가 손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 AI가 있다.


2008년쯤이었다.

‘디자인 경영’이라는 단어가 세상을 떠돌던 시절.

무엇이든 앞에 ‘디자인’을 붙이면 그럴듯해 보이던 때였다.

그 시절의 ‘디자인’은 권력에 가까웠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신화였고, 그가 말하는 ‘감성’과 ‘혁신’이 하나의 종교처럼 번졌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디자인은 더 이상 신비롭지 않다.

어떤 툴로든 누구나 만들 수 있고 '센스 있는 일반인’이 디자이너를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인의 민주화는 동시에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흐려놓았다.

벽이 무너졌고, 장벽이 낮아졌다.


음악도 다르지 않다.

지금의 30대, 40대는 모두 학창시절에 ‘노래방’이라는 문화를 통과했다.

전국민이 노래를 부르던 세대다.

이제는 특별히 잘 부르는 사람보다 자신의 스타일로 노래하는 사람이 더 돋보인다.

기술이 아니라 매력이 기준이 된 세상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AI가 등장하기 전의 이야기다.

이제는 AI가 목소리를 복제하고, 감정까지 시뮬레이션한다.

‘노래한다’는 행위조차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디자인, 음악, 글쓰기, 영상. 모든 분야에서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예전에는 전문가의 영역이라 불리던 곳들이

이제는 클릭 몇 번이면 접근 가능한 놀이터가 되었다.

코딩이 그랬고, 영상이 그랬고 이제는 생각조차 복제 가능한 시대다.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있다.


솔직히 말해, 예전엔 저 멀리 있던 세계가 이제는 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이상하게도 ‘내가 앉을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거대한 세계 속에서 나만의 자리 한 칸이 만들어질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동시에, 그 틈은 빠르게 닫히고 있다.

AI와 로봇은 인간이 열어둔 그 작은 균열을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파고든다.

우리가 만든 도구가 이제는 우리의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

인간이 세운 벽이 낮아지는 동안,

AI는 그 벽 사이의 틈을 자신의 놀이터로 바꾸고 있다.

장벽은 허물어졌지만, 그 안에 남은 자리는 생각보다 좁다.

그래서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새로운 놀이터에서, 나는 어디에 앉을 수 있을까?”




놀이터의 펜스를 내가 긋는다


우리는 언제나 무한을 꿈꾼다.

끝없는 가능성과 자유,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한다.

하지만 정작 몰입하는 순간은,

그 무한 속이 아니라 규율 속이다.


자유는 준비되지 않으면 곧장 무기력으로 흐른다.

무한히 펼쳐진 들판에 선 아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멈춰 서는 것처럼.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계를 만든다.

규칙과 질서 그 안에서 스스로를 몰입하게 한다.


작은 성취가 잦을수록

성장의 감각은 더 진해진다.

거대한 목표보다 오늘 쌓은 한 줄, 오늘 정리한 한 장.

그 반복이 우리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든다.


핵심은 결국 ‘내가 들어갈 틈’이다.

그 틈을 얼마나 정확히 느끼는가,

그 감각이 곧 나의 그릇을 가늠하게 한다.

AI는 이 틈을 넓혀준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세상,

벽이 낮아지고 문이 열린다.


하지만 동시에, AI는 그 틈을 더 빠르게 파고든다.

인간이 만든 놀이터를 확장시키는 동시에

그 경계를 다시 자로 재며 좁혀버린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 놀이터의 펜스만큼은 내가 직접 긋기로.




무한을 욕망하되, 놀이터에서 잘 놀자


몇 년 전, 나는 과잉의 자유를 받아들였다가 흐트러졌다.

하고 싶은 걸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뛰어들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허기와 무기력 사이를 헤맸다.


그때 배운 건 단순했다.

자유는 넓이의 문제가 아니라 장치의 문제라는 것.

끝없는 공간에서 방황하느니,

작은 울타리 안에서 몰입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장치들을 세웠다.

하루를 시작하게 만드는 알람, 집중을 돕는 환경,

함께 자극을 주고받는 사람들,

그리고 매일 쌓아가는 작은 성취들.

그게 나의 펜스이자,나의 놀이터다.


기술은 장벽을 낮추고,

세상은 점점 더 많은 틈을 만들어준다.

예전엔 멀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이제는 손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나는 여전히 무한을 욕망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무한을 향해 달려가려면,

먼저 내가 머무를 놀이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들어가는

그 놀이터 안에서 더 잘 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