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하게 재조합되고 경험되는 브랜드

브랜드의 역사 -9- 플렉서블 브랜드, 브랜드 경험

by 비노

1981년 등장한 MTV는 음악 업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 영향력은 음악 비즈니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맨해튼 디자인이라는 에이전시에서 디자인한 MTV의 로고는 젊은 세대의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상징성을 표현한 것이었죠. 특히, 로고의 색상과 형태가 고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었던 세상에서, 처음으로 로고가 놓여진 주제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형태를 변화하는 방식은 자유로움 그 자체를 상징하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브랜드 디자인의 가능성 — 즉 플렉서블 아이덴티티의 탄생을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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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정된 로고는 재미없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80년대부터 한 건 아니었습니다. 1955년에 스위스의 디자이너 칼 거스트너(Karl Gerstner)가 디자인한 레코드 가게 「Boîte à Musique」 의 아이덴티티 사각형 프레임 안팎으로 글자를 배열하는 규칙 아래 크기와 배열에 변주를 주고, 이를 다시 쪼갬으로서 다양한 크기와 포맷에 대응할 수 있는 그래픽 시스템을 선보였고, 1960년대 Wolff Ollins는 Hadfield’s Paint사의 브랜드에 제품마다 다른 여우 이미지를 넣는 파격적인 시도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초창기 사례들은 제품마다 상이한 시각 요소를 적용함으로써 소비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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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업이 쉬워진 것은 브랜드를 개발하고 싣는 매체가 디지털로 옮겨지면서입니다. 온라인과 인터랙티브 환경에서는 그래픽 시스템을 보다 더 유연하게 개발하고 또 보여주기 편했죠. 1998년 구글 임원진들이 버닝맨 스튜디오에 놀러간 걸 자랑한 데서 시작해 오날까지도 선보이고 있는 구글 두들은 디지털 공간 속에서 같은 아이덴티티를 놓고 다양한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이 끊임없는 변주를 선보이는 장이기도 합니다.


플렉서블 아이덴티티는 2010년 들어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2009년 랜도(Landor)가 디자인한 멜버른 시의 로고는 M자의 형태만 남긴 채 수십 가지 형태와 색상으로 변형되는 모듈형 아이덴티티를 도입해 도시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표현하고자 했고, MIT 미디어랩은 2011년 알고리즘을 통한 생성형 아이덴티티를 통해 최대 4만 가지의 로고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연구원과 학생 개개인이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물론, 로고 자체가 완전히 플렉서블한 아이덴티티는 태생적인 불안정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아이덴티티 형태로 수렴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오늘날의 플렉서블 아이덴티티는 로고 자체의 변화보다는 로고 배후의 그래픽 모티프 또는 로고의 일부 요소만을 변화시켜 다양성을 추구하는 형태로 타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종이와 그래프, 줄자에서 벗어나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진 모듈화와 패턴화는 지금까지도 브랜드 표현을 더 풍성하게 하는 기본적인 기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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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MTV가 최전성기를 누렸던 90년대는 한편으로는 ‘인터랙티브’의 시대였습니다. 컴퓨팅과 네트워크의 발전에 따라 거의 모든 매체가 일방향적인 송수신을 넘어, 사용자 또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콘텐츠를 지향했고, 서비스 중심의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너도나도 자신들의 서비스를 ‘경험’해보기를 권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1990년대 경험 경제(Experience Economy)를 통해 대두된 브랜드 경험의 시작입니다. 컬럼비아 대의 번드 슈미트(Bernd Schmitt)는 ‘체험 마케팅 Experiential Marketing’ 이론을 통해 소비자의 체험적 반응을 중시하는 새로운 마케팅 관점을 제안하였는데, 그는 소비자가 브랜드와 상호작용할 때 감각(Sense), 감성(Feel), 인지(Think), 행동(Act), 관계(Relate)의 다차원적 경험을 얻는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러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브랜드 경험은 곧 브랜드-소비자 관계의 핵심 요소로 부각되었고, 브랜드 관리의 패러다임이 제품 기능 중심에서 총체적 경험 중심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브랜드 경험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정립된 것은 21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2009년 브라쿠스(Brakus), 슈미트(Schmitt), 자란토넬로(Zarantonello)는 브랜드 경험을 “브랜드와 관련된 자극에 의해 소비자에게 유발되는 주관적이고 내적 반응과 행동적 대응”으로 정의내렸습니다. 이들은 브랜드 경험의 차원으로 감각적 경험(sensory), 정서적 경험(affective), 인지적 경험(intellectual), 행동적 경험(behavioral)을 제시하였습니다. 즉, 브랜드의 디자인이나 소리, 브랜드에서 얻는 즐거움이나 회상 같은 정서적 반응, 브랜드에 대한 상상, 직접 행동 등이 어우러져 전체적인 브랜드 경험을 형성한다는 것이죠.


이후 경험의 차원에서 브랜드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이러한 연구들의 핵심은 경험이 여러 차원에 걸쳐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브랜드를 다루는 사람은 이제 단순히 종이 위의 브랜드, 어딘가에 인쇄되거나 걸리게 되는 브랜드를 넘어, 브랜드가 한 사람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선사하는 감각, 브랜드의 공간, 삶 속에서 사용되는 방식과 문화적 의미, 스토리텔링을 통한 감성 자극, 그리고 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이벤트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으로 개념이 넓어졌습니다. 브랜드 경험(BX)이 사용자 경험(UX)이나 고객 경험(CX)을 포괄하는 개념이 됨에 따라, 오늘날의 브랜드 기획자 그리고 디자이너는 단순히 브랜드 전략이나 디자인을 넘어 공간, 마케팅, 이벤트, 웹/SNS 심지어는 ESG 경영 활동 등 거의 모든 일을 브랜드의 이름 아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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