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도 자식도 지켜봐 주세요
나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임용고시를 딱 한 번 보고는 이 길이 아니다 싶어 사교육계로 발길을 돌렸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고 결국 소수점 단위로 불합격했는데 과연 전국에 나와 같은 사람이 몇 만이나 되는가 싶어 내 열정을 다른 곳에 쏟기로 혼자 다짐했다. 부모님의 만류가 있었으나 그때의 그 결정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 후 결혼하고 첫아이 임신 초기까지 사교육계 경력을 따지면 적지 않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낸 셈이다.
특히 출산 전 마지막 직장이었던 기관은 강남에서도 유명한 나름 머리 좋은 아이들이 다닌다는 영재교육기관이었는데 시골에서 별다른 사교육 없이 자란 내게 매일 문화적 충격을 안겨단 준 곳이었다. 만 5세의 어린아이들이 지능테스트를 하고 기준에 도달해야 기관의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수업은 분기마다 과목이 돌아가며 진행되는데 만 5세 6세의 미취학 아동들의 언어 수업의 수준이 일반적인 아이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월등히 높아 교사 회의 때마다 적잖이 놀라고 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곳의 아이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기가 막히게 만들어진 계획된 영재다. 그 아이들은 뱃속에서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태교의 과정을 거쳐 태어나면서부터 각종 사교육 및 교구에 노출된 아이들로 기저귀보다 한글을 먼저 떼는 경우가 이상할 것 없고 만 5세 전에 한 편의 글을 무리 없이 써 내려가는 수준에 이른다. 두 번째는 타고난 영재다. 이 부류의 아이들은 기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유형인데 스쳐가는 눈빛만 봐도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가 아이의 특성을 일찍이 파악하고 그에 맞는 교육을 제공한 경우 시너지가 폭발함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그 경우 아니라도 결국은 타고난 영재성을 드러내며 반짝이게 된다.
다양한 유형의 많은 아이들을 접하면서 나의 육아에 관한 나름의 기준이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적어본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시기, 즉 적기라는 것이 있다.
-한글은 만 6세 생일이 지나고 가르친다.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용서가 되는데 인성이 바르지 않은 것은 용서가 없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어려서부터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의 기준은 막상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며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작 부모는 아무렇지 않은데 주변의 간섭과 불필요한 걱정으로 평온하던 부모의 마음까지 어지럽히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영재들을 가르쳤다는 이력을 지닌 엄마가 생각하는 기준치고는 상당히 독특하게 보일 수 있는 것들 뿐이다. 그런데 저 기준이 모두 영재들을 가르치며 생겨난 나의 확고한 가치관들임에는 틀림없다.
나의 큰아이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몹시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다. 남편을 닮아 털털하고 조급해하지 않는 여유가 있는 성격인데 5살 어린이집 생활을 할 때 같은 반에 한글을 깨친 아이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하루는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00이가 나한테 편지 써 줬어. 그래서 나도 그림을 그려줬는데 00이가 나는 한글도 모르니까 편지 아니라고 구겨서 버렸어. 내가 엄청 마음이 안 좋았지만 나는 00 이보다 그림을 잘 그리니까 괜찮아.”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 아이 친구 엄마들이 방문교사나 탭을 이용한 교육프로그램을 활용해 아이들에게 한글 수업을 시작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내 소신껏 아이의 일곱 살 생일이 지나면 그때 한글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너도 한글 배우고 싶어? 엄마랑 한글 공부할래?”
“아니. 나는 아직 괜찮아. 그런데 엄마, 한글 모르면 바보야? 나는 바보 아닌데 00이가 바보라고 했어. 그래서 내가 너가 바보니까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야,라고 말해줬어.”
아이 말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 당황했던 내 마음도 가라앉는 듯했다.
국어교육을 전공했지만 자기 아이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 엄마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전공자가 가르치는 한글이라 자신이 있어 느지막이 시작하느냐는 이야기도 들어봤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는데 나의 육아법은 원시인 육아법이다. 생존에 무리 없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육아의 철칙인데 아이의 성장기에 맞춘 적기 교육을 제공해 주고 싶은 것이 내 육아의 목표인 것이다.
어느 날 시어머니와 통화를 하다 이런 질문을 받았다.
“나랑 같이 일하는 분 손녀가 짱짱이(첫애 태명)랑 같은 나이인데 한글 다 떼고 구구단 한다고 자랑하더라. 그러면서 짱짱이는 한글 다 뗐냐 물어보길래 나는 우리 며느리가 교육 전문 가니까 알아서 하게 냅둔다고 했다. 부모가 있는데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데 왜 다들 손자, 손녀 자랑을 못해서 안달들인지 몰라. 그런데 나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요즘 애들 한글을 그리 빠르게 다 떼고 구구단까지 달달 외운다는데 너는 짱짱이가 아무것도 아직 못해도 괜찮니?”
시어머니께서는 괜찮다고 며느리를 믿기 때문에 손주 교육은 알아서 할 거라고 이야기하셨겠지만 그 마음속엔 할머니로서 다소 느린듯한 손녀딸을 생각하면 답답함이 있으셨으리라 짐작된다. 하긴 요즘 아이들 선행 속도가 어지간히 빠른 것이 아니라 정속도로 가고 있는 아이도 매우 느린 것처럼 혹은 정지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초등 2학년인데 중학교 과정 수학을 한다는 아이, 초등학교 입학 전인데 원서로 된 글밥이 많은 동화를 읽고 해석한다는 아이, 어른도 이해하기 힘든 의학 원서를 보면서 생물 공부에 도움을 받는다는 아이까지 대한민국은 선행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내 아이가 뒤처지는 것이 안타깝고 부모로서 선행을 위한 학원을 적극적으로 알아보지 않는 것이 직무유기가 된 세상에서 나 같은 소수의 엄마들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든 별종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별종의 엄마들도 결국은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학원을 찾아 기웃거리게 된다.
아직 유치원,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어찌 그리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학 1년 시절부터 학원가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쌓은 내공이 그 모든 것을 깨우쳐주었다고 답하련다. 과거를 되짚어 보니 만 5세부터 고3까지 가르친 경력이 있는 나에게 유아기 선행은 그저 엄마의 취미생활쯤으로 생각되는 과정이다.
아이마다 머리가 트이는 시기가 다르고 성향이 다르다. 그런데 선행에 있어서는 천편일률적으로 어느 시점에서 ‘탕’하고 총소리가 울려 달려야 하는 것 마냥 조바심을 낸다. 그리고 걷는 아이에겐 뛰지 못한다고, 뛰는 아이에겐 속도가 빠르지 않다고 채근을 해 댄다. 아이의 체력이나 자율적 의지와 무관하게 부모의 기준에 맞춰 달리게 하다 보니 결국 수많은 아이들은 중도 포기자가 되거나 경기가 끝난 뒤 허탈하게 기준점을 통화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물론 부모의 계획대로 무리 없이 잘 따라와 주고 결승점에 일찍이 도달하며 기록을 경신하는 극소수의 아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말 그대로 극소수이며 그들이 행복했는지 아닌지는 온전히 그들만 아는 문제일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기를 기대하며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 마음은 임신 전이나 아이가 영유아기 시절이나 그리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앞으로 자라날 나의 두 아이가 머리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진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마음의 힘이 단단한 사람은 어떤 일이 주어져도 해 낼 수 있음을 믿기에 그런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약속대로 나는 아이의 일곱 살 생일이 지난 2019년 9월부터 한글 교육을 시작했다. 2020년 3월 입학 예정이었던 우리 아이는 그해 2월에서야 비로소 한글을 제대로 깨칠 수 있었는데 늦게 시작한 만큼 속도는 다른 아이들의 두 배, 세 배가 되어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며 성장했다.
첫째의 한글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나는 5살에 한글을 뗀 시골에서 보기 드문 똑순이였는데 엄마가 병설유치원에 입학 자격도 되지 않는 나를 우겨 입학시키기 위해 5살에 일찍이 한글을 떼고 6살 반으로 월반시켜 입학을 했다. (친정 엄마는 서울서 아가씨 시절을 보내고 갑자기 오지 깡촌 시골로 시집을 간 동네서 흔하지 않은 새댁이었고 교육열도 서울 사는 친언니들에게 영향을 받아 시골스럽지 않게 강렬했다) 그 당시 나는 한글을 다 알고 입학을 하니 7살인데도 한글 모르는 언니 오빠가 수두룩했고(1988년, 하루에 버스가 대여섯 대 밖에 드나들지 않던 시골에서는 그랬다) 모두 글씨를 나에게 와서 묻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렇게 딸을 키웠는데 그 딸이 아이를 낳아 전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있으니 친정 부모님은 통화를 할 때마다 속이 터진다고 하셨다. 친정부모님은 내가 아이를 가르치기 힘들어 그러는 줄 아시고 방문교사를 불러서라도 아이 한글을 떼게 해야지 답답하지 않겠냐고 조기교육을 종용하셨는데 정작 답답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아니었나 싶다.
아마 우리 시어머니가 우리 엄마와 같은 성향의 소유자였다면 며느리인 내게 아이의 교육을 두고 훈수를 참 많이 두셨을 것 같다. 그런데 시부모님은 그 부분에 있어서도 전혀 상관하지 않으셨고 오롯이 우리 부부를 믿고 지켜봐 주시며 응원해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도 시어머니에게서 한글을 여섯 살 즈음 뗐다고 하는데 며느리의 느리고 답답한 자녀 교육관을 인내를 갖고 지켜보실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는 그 말이 어쩌면 내가 소신을 가지고 아이들을 키우는 데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모든 것이 서툴고 확신이 서지 않았던 그때에 나의 선택을 믿어준다는 그 말이 그 어떤 물질적 지원이나 격려보다 값진 것이었다. 다른 집 아이들은 한글 떼고 영어 파닉스 한다는데 우리 아이는 한글은커녕 그림책 들고 와서 읽어 달라하곤 딴짓하기 바쁜 일상에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지켜내기로 한 육아의 기준을 주변의 상황에 휩쓸려 꺾고 싶진 않았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아이들은 믿는 만큼 자란다. 늦게 한글을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잘 학교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2학년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일기를 보고 보통의 글솜씨가 아니라면 내게 극찬의 전화를 해 주셨다. 방과 후 수업에서 논술을 선택했는데 선생님이 추천하신 어린이 시조 나라라는 책에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첫째의 시조가 실리기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한글을 겨우 뗀 아이가 해낸 성과치곤 너무 대단해서 그저 잘했다, 멋지다 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인데 아이 스스로도 뿌듯해하며 자존감을 키우는 것 같아 기특하다.
반대로 누나보다 세 살 어린 둘째는 모든 것의 기준이 누나로 맞춰져 있다. 그래서 자기 나이는 망각한 것 마냥 누나가 배우는 것, 누나가 하는 것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도 가, 나, 다, 라 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만 5세에 친구들 어깨너머로 눈치껏 배워 한글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예정에 없던 둘째의 한글 깨치기는 또 한 번 나를 생각하게 했는데 엄마의 계획보다 1년을 앞서서 체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만의 한글 세계를 만든 아이를 보면서 자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한글도 숫자도 그렇게 누나와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깨우친 둘째는 성향이 전혀 다른 아이로 파악되는데 앞으로 어떤 성장을 이룰지 기대가 된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배우는 것은 늦고 빠르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빠르게 피어 빠르게 지는 꽃도, 다른 꽃 피고 지는 그 마지막에 피어나는 꽃도 다 꽃이다. 내 아이가 빠르게 피어나는 꽃이든 늦게 피어나는 꽃이든 나의 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사실을 시부모님은 먼저 인생을 살아본 선배로서 잘 알고 계셨기에 별다른 첨언이나 불편한 기색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로서 우리 부부를 존중해 주셨기에 함께 기다려주셨음을 안다.
참견과 간섭은 사랑이 아니다. 믿고 기다리고 지켜보는 것이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다. 당사자가 가장 많이 고민하고 늘 마음 졸이며 상황을 주시한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어려서부터 자식에게 늘 헌신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은 세대답게 결혼을 시킨 후에도 자식들의 모든 생활에 함께 관여하고자 한다. 자식을 키우는 문제에 있어서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변인이 아닌 중심인이 되어 팔 걷고 나선다. 그래서 지인 중에 어린이집 교사를 하는 분이 있으신데 아이들끼리 싸움이 나면 이튿날 부모 2명, 조부모 2명, 외조부모 2명 다 해서 6명을 뒤에 세우고 등원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봐 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었다.
아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은 지켜볼 수 있는 용기, 아이의 부모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은 믿고 지지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 조언이나 고민을 들어주며 진심으로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혜안이 우리 부모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