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1일 화요일
결
오늘은 다양하다. 말하자면 오늘은 그렇다. 오후 내내 직사 하는 볕 속에 있었다. 여름 불볕이었다. 주로 탈 것의 안쪽에 머물다가 딱 한 번 바람 부는 야외에 나와 있었는데, 다 지나고 보니 왜인지 그 잠깐의 기억만이 눈에 선하다. 나는 역 앞에서 오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늬 없는 순백색 드레스를 입고서 품에는 커다란 책을 한 아름 안은 채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직사광을 피해 그늘 곁에 가 앉았다. 바람은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돌연 불어닥쳤고, 바닥에 잔잔한 것들을 한꺼번에 뒤집어 놓을 만큼 기운이 사나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어슷어슷 비껴 드는 빛의 움직임을 멍한 시선으로 따라가면서 바람이 오고 가는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바람 자체는 일정한 방향을 갖고 있는 듯했지만, 바람을 타는 것들은 달랐다. 그것들은 그냥 마구잡이로 휩쓸리다가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작고 미세한 자갈과 그보다 더 사소한 부스러기, 바스락대는 잎사귀, 물결치는 치맛자락, 그리고 또 휩쓸리는 것…… 마음도 그중 하나였다.
해가 쨍한 오후에 내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런 걸 바라보았던 건, 단순히 시간을 죽이고자 함이 아니라 그것이 당시 내 시야에 포착된 유일한 움직임이었을뿐더러 그런 것을 바라보는 일, 즉 끊임없이 역동하는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은 내게 하나도 어렵지가 않고 오히려 어딘가 흥미로운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만으로도 때로는 어떤 진실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바람에 휩쓸리는 것들은 대개 크기가 적거나 미약하다는 특성을 지녔고, 뿌리가 깊고 단단한 것들은 제자리에서 태연했다. 마음에도 단단한 뿌리가 있다면 좋을 텐데. 강해져야 하는 순간에 있어서는 말이야.
오기로 한 사람이 도착할 즈음이 되어 땅에 두 발을 딛고 섰다. 그 순간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는데, 내가 아주 아주 적은 모래알처럼 여겨졌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림자마저 위태롭게 일렁였다. 나는 품 안에 책을 더욱 힘주어 그러안았다. 팔 안쪽의 여린 살을 지그시 내리누르는 겉표지의 단단함으로부터 모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사라지면 안 돼. 지금은. 지금은 여기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아직은 여기에 올 사람이 있다. 네모반듯한 책머리를 감싸 쥔 손에 땀이 배어났다. 미끌거리는 손의 감촉 그대로 그것을 계속 쥐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왔다.
손
오늘은 또 강렬하다. 무엇보다 손이 그렇다. 강렬하게 붙잡는 손이 있었고, 강렬하게 뿌리치는 손이 있었다. 강렬하게 붙잡는 손은 강렬하게 뿌리치는 손이기도 했으며, 강렬하게 뿌리치는 손은 강렬하게 붙잡는 손이기도 했다. 바람 한 점 스밀 틈 없이 꽉 막힌 곳이었음에도 세계는 더 격렬하게 휩쓸리고 뒤집혔다. 이를테면 눈빛과 손짓과 마음 같은 것들이 그랬다. 두 개의 손이 하나로 포개졌다가 두 개로 갈라졌다. 두 개로 갈라진 손이 다시 하나로 포개졌다. 시간 차를 두고 이 모든 일이 같은 곳에서 반복되었다. 공간의 협소함 탓인지 손에서 비롯하는 시각적 효과는 더욱 두드러졌다. 뒤엉킨 손에서, 자꾸, 뭔가가, 나왔다. 나온 것이, 자꾸, 굽이쳐 올랐다. 굽이쳐 오른 것들이, 결국, 극에 달했다. 더는, 더는. 어느 순간 우리는 무력해졌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빠져나온 손들이 볕 속에서 그저 환하게 말라갔다.
누구도 멈춘 차 안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그럴 수야 있겠으나 나는 그렇지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차가 멈추면 응당 내려야 함을 뜻한다는 걸 아는 정도의 지혜를 가졌고, 타인에게 마땅히 보여야 하는 품위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부터 내가 끝까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마지막 순간에 문을 연 사람은 나였고, 문을 닫은 사람도 나였다는 것이다. 누구도 대신 문을 열지 않았으며 또한 누구도 대신 문을 닫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모두 내가 한 일이다. 모두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다만 달리던 차가 멈췄을 뿐. 누군가는 멈춰야 하고, 누군가는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일 뿐. 그러니까 누구도, 무엇도 탓하지 말기로 하자. 차가 멈춘 걸, 내가 내린 걸. 그걸 탓할 거라면 애초에 타지 말았어야지.
시티로 돌아왔을 땐 아주 차분했다. 다만 손이 너무 가벼운 게 이상해서 충동적으로 옷가게에 들렀다. 옷감과 품을 살피고, 분위기와 색의 조화를 가늠하며 신중히 옷을 골랐다. 대수롭지 않은 일을 대수로운 일처럼 그렇게 했다. 지금은 그래야 한다. 창문을 열어두고 새 공기를 안으로 들여야 한다. 직원이 담아준 봉투는 어쩐지 내용물보다 훨씬 컸다. 윗부분을 꼬깃꼬깃 접어 품에 안고서 다시 거리로 나섰을 땐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걸어가자, 그렇게 마음먹고 혼잡한 거리를 빠져나와 긴 다리를 건넜고, 몇 번의 신호를 거쳤다. 멈춰 있는 동안엔 그저 멍했다. 창문을 열어도 해묵은 공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렇다. 내게 묻은 티끌 하나 제대로 떨치지 못한다. 그것의 존재와 약함을 염려한다. 하물며 너는. 나는 네 작고 여린 숨을 가장 가까이서 들었는데. 털어내도 털어지지 않는 티끌은 그냥 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그냥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결정을 잘했는가 아닌가를 따지기보다는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는가 아닌가를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본능에 따른 순간의 판단을 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자신의 생존과 관련 있다면 도덕과 윤리를 따지는 건 나중 일이니까. 결국, 모든 건 삶과 죽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와 그 사람이 과연 삶을 택한 건지 죽음을 택한 건지는 조금 더 두고 볼 일이겠지만.
집으로 돌아와 옷을 봉투 그대로 옷장에 넣어두었다. 그리곤 평소대로 하던 일들을 했다. 샤워를 오래 했고, 늦은 저녁을 먹었으며, 자주 듣던 음악을 들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눕자 마음이 불쑥 초조해졌다.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는데도 기다리는 습관은 여전했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할까. 이제니의 시구가 자꾸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차 안에서부터 그랬다. ‘이제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겠다, 반성을 반성하지 않겠다.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습관…….’ 반성과 우물. 우물과 반성. 내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는 것. 그건 자연스럽지가 못하고 어딘가 뒤틀려 있다. 그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돼. 그런 이상한 다짐을 하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꽉 막힌 어둠 속에서 빈손을 자꾸 쓸어내렸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 부는 소리가 스며들었다. 다시금 오후를 기억해냈다. 돌조각과 부스러기와 잎사귀, 그리고 새하얀 치맛자락…… 바람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오후가,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아주 긴 잠을 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