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4일 월요일
테오에게
이 사랑이 시작될 때부터, 내 존재를 주저 없이 내던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승산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나를 던진다 해도 승산은 아주 희박하지. 주어진 기회가 크거나 작은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 아니겠니.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을 이룰 가능성을 미리 헤아려야 하는 걸까? 이 문제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지.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니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한 여인이 사랑의 성공 여부를 미리 계산해 본 후에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보렴. 그녀는 “절대 안 된다”보다 더 극단적인 대답을 하지 않을까.
테오야, 그런 건 생각도 하지 말자.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면, 그냥 사랑에 빠진 것이고, 그게 전부 아니겠니. 그러니 실의에 빠지거나 감정을 억제하거나 불빛을 꺼버리지 말고, 맑은 머리를 유지하도록 하자. 그리고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저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고 말하자.
1881년 11월 10~11일
_빈센트 반고흐
2020년 9월 14일 월요일
종이접기하듯 사랑을 크게 반으로 접고, 접힌 면을 또 한 번 반으로 접은 다음, 처음 모양 그대로 펼쳐 들여다본다. 네모반듯하게 그어진 경계 안쪽으로 ‘사랑’에 속하는 무수한 단어들이 전광판에 떠오르는 텍스트처럼 점점이 깜빡이더니 하나둘씩 불빛을 잃고 소멸한다. 무지. 편견. 질투. 집착. 오만. 슬픔. 상실. 권태. 불안. 기쁨. 환희, 설렘. 기대. 애정. 기다림. 이해. 관용. 연민. 충만함……
사랑의 어느 면에 나를 둘 것인가. 무심결에 나를 쥐고 흔드는 물음. 일상을 비집고 파고드는 이런 우연한 물음은 대개 진리에 관한 실마리를 얼마쯤 내포하고 있는데, 삶이 결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임을 스스로 증명하듯 그것을 풀 만한 열쇠는 좀처럼 쉽게 쥐어지지 않는다. 거대한 질문에 가로막혀 나는 멈춰 있다. 구름이 해를 가리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빛을 거둬들인다. 눈 깜짝할 새 빛은 간데없고 세상은 반쯤 어두워졌다. 내가 멈춰 있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달라지는 세계가 있고, 복잡해지는 구조가 있구나.
사랑만이 전부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 사랑하는 영혼은 살아 있는 영혼이다. 서로에게 빈틈없이 끼어들어 속속들이 탐닉하고 감각하고 그 느낌으로부터 살아 있음을 인지한다. 손의 움직임으로 우리가 우리의 몸을 알듯이, 마주한 얼굴 안에서 뒤섞이는 숨결 속에서 순간이 강렬해진다. 우거진 나무 그늘 밑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한껏 포개지다가 어지러이 부딪는 나뭇잎 소리를 듣는다. 때로 눈이 부신 햇살 아래 그가 서 있고,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그의 실루엣을 보려고 애쓴다. 그는 흩어지는 빛 조각들. 가끔 밤에 나를 보러오고 그렇지 않은 날엔 내 잠으로 찾아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서 그러나 모든 말을 다 꺼내 놓을 수 없어서 조급해지고 침울해지는 넝쿨 속. 나는 그 속에 혀를 내밀고 사랑에 빠진 개.
사랑하는 이의 아침을, 떠올려 본 적이 있다. 그가 아침에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얼굴인지, 어떤 기분인지 같은 것들을. 직접 물은 적은 없지만, 당신의 아침에 관해 상상해 보려고 시도했다. 곤히 잠든 얼굴, 깨어나기 전의 뒤척임, 힘없는 뒷모습 같은 것들을.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도무지 현실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아 그만두었다. 이럴 때 나는 깨닫는다. 아, 내가 당신 곁에 없는 사람이구나. 당신이 내게 없듯이.
우리는 대체로 끊어져 있고, 가끔 이어진다. 대체로 이어져 있고, 가끔 끊어져 있다, 이렇게 바꿔 말해도 우리는 말이 된다. 어떻게 해도 가능한 관계. 그런 건 뭘까. 사랑이라 부를만한 것일까. 아니면, 사랑의 변두리 또는 경계에 걸쳐 있는, 애매한 무엇일까. 이미 너무나 오래 해온 고민이다. 모호함이 모호함을 낳는다. 부정은 또 다른 부정을, 회피는 또 다른 회피를,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 것처럼.
사랑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침울해진다. 꼬리를 물고 엄습하는 불안이 일상을 침범한다. 나는 사랑에 발목 잡혀 끌려다니는 죄수가 아니다. 그러니 그렇게 행동할 필요는 없지. 스스로 만든 감옥에 스스로를 가둘 필요는. 내가 사랑의 주체임을 확인하고 스스로 위치를 선점하는. 모든 결과는 대상으로부터의 결과다. 불안은 허상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낮게 엎드려 밀려드는 파도를 다 맞는 바위를 생각한다. 사랑을 지킨다는 건 그런 것일 테지.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면. 내가 긴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그것은 반드시 자각몽이 되어야 한다. 나의 약함을 알고 매일의 기도를 올리자.
그가 꽃을 꺾어다 내게 주었다. 너무 아름답고 예뻐서 울컥했다. 멀찍이 사랑하는 이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결연해진다. 사랑의 어느 면에 나를 둘 것인가. 사랑의 중심에, 가장 깊숙한 심장에 나를 놓기로 하자. 변두리를 지나 가장 내밀한 곳으로 흘러들어야 한다.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저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브리즈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