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명상

2022년 6월 27일

by KIKI


아침부터 감기 기운이 있어 약을 먹고 내리 잤다. 열은 없으나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의 감각이 둔하다. 몸의 감각이 둔하니 세계의 감각도 둔해진다. 열 한시쯤 일어나 밥을 먹고 다시 누웠다. 계획이 이렇게 또 틀어지는구나. 오늘 하려던 일들이 있었는데, 좀 많이 걷고 멀리 가야 하는 일이었다. 오늘의 몸상태로는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겠다 싶어 집에서 쉬면서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올리비아 랭의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꽤 재미가 있었다. 읽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나 다시 읽기를 반복하느라 페이지가 더디게 넘어갔다. 정신이 몽롱하고 몸에 기운이 없으니 졸음이 계속 쏟아졌다. 잠 속에서 정신이 번쩍들면서 의식이 선명해질 때 어떤 문장들이 선을 그리며 떠올랐다. 그것은 사실 완성된 문장이라기보단 단어들이 뒤죽박죽 얽힌 채 회전하는 불완전한 암호에 가까웠다. 풀어지길 기다리는 것처럼.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걸을 힘도 없는 몸을 겨우 끌고 카페로 향했다. 쓰여지길 기다리는 문장을 쓰러,


아침에 기린과 통화를 했다. 그것은 매우 평범한 대화였고 딱히 기억할 만한 포인트도 없었으나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어제까지, 내가 그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어제 나는 울면서 그를 증오하고 멸시했다. 하루 종일 그에게 화가 나 있었는데, 표면상으론 그가 나를 기다리게 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다. 그건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실패한 욕망. 실패할 걸 알면서도 갈구하는 욕망. 그러니까 결코 해결되지 않을 욕망 때문에 나는 계속 화가 났다.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가 미안해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조금 더 여유를 가졌었더라면, 조금 더 차분했더라면 그를 그런 식으로 질책하거나 보채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이 불안을 침잠해 들어간다. 불안이 불안을 증폭시키고 불안이 불안을 잠식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나는 왜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있는가. 왜 막다른 곳으로 자꾸만 나를 내모는가. 그가 전화를 거절했을 때. 그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다시 잠들 때. 울음이 터졌다. 그를 견디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나를 견디기 어려워서.


아침에는 그냥 모두 잊기로 했다.


이 슬픔을 더 지속시키지 않기로. 그래서 우리는 다시 평온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를 미워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로 나는 그의 말에 온 주의를 기울여 반응하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에, 웃음과 농담에 안도했다. 그러다 문득., 사랑을 한다는 것의 지난함이 나를 짓눌렀다. 사랑은 탐닉. 사랑은 증오와 멸시. 멸시와 환대. 환대와 희생과 겸손…..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어루섞이고 그리하여 끊임없이 자가당착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자기 혐오와 타인을 향한 부정의 부정의 부정을 낳는. 사랑이 일으키는 장해와 사랑이 소생시키는 삶, 사랑의 멸망과 구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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