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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Mar 04. 2019

나는 걸어서 리스본에 간다.

골목 소묘

집을 나서 골목길로 나오자 동네 할머니가 작은 수레를 밀며 가고 있다. 수레에는 커다란 박스 위에 작은 박스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종이류만 있는 게 아니라 플라스틱 호스도 뒤엉켜 얹혀있다.


할머니는 단발병에 걸릴 길이의 머리인데 그 머리조차 뽀글뽀글 파마이다. 머리 한 지 오래되어 보였다. 내리막길이라서 수레는 편하게 앞으로 갔고 덜컹이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경성고를 끼고 있는 네거리에서 할머니는 가로등이 깔아 놓은 그림자를 따라 왼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경성고 후문으로 직진했다.


가로등을 지날 때마다 내 그림자는 부채꼴을 그렸다. 새로 단장한 건물에 불빛이 환하다. 재봉틀이 있는 작업실이다. 실패가 벽장에 도열해 있다. 맞은편에 있는 오래된 유치원의 담장이 무너져 있다. 붉은색 락카로 '위험', '접근금지'라고 휘갈겨져 있다.


횡단보도 건너 홈플러스에 들어오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코트를 입은 행인이 나를 앞서 걸어간다. 코트 자락 스치는 소리가 횡단보도의 하얀 띠를 퉁긴다. 홈플러스를  지나자 공원이 컴컴하다. 지나가는 차들이 쏘아대는 불빛에 눈이 부시다. 고개를 돌리자 새로 생긴 투썸플레이스에서 공사장 냄새, 본드 냄새가 난다. 주차장인지 테라스인지 모를 외부공간 낮은 화단에 플라스틱 조화 같은 식물이 꽂혀있다.


리스본 앞 뜰에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무를 스치고 귀에 닿는 바람이 쌀쌀하다. 서점 안에 프로젝터의 스크린 빛이 번쩍거리고 서성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벽을 타고 울렁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눈인사를 나눈다. 오늘 밤 여기서 난 글을 타고 여행을 떠날 것이다.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갈 수 있는 동네 여행. 우리 동네 ‘서점, 리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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