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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기 Jan 11. 2019

괜찮은 곳에서

 여행 손바닥 소설

'저기요. 실례지만 정말 혹시 레에 가보신 거 맞나요?'


전자레인지에서 라면을 꺼내왔을 때 인스타그램 디엠으로 온 메시지였다.

읽씹.

유튜브를 화면에 띄웠다. 한국에서 먹방 하는 외국인의 채널로 들어가 아무 영상이나 재생했다.

후루룹 면발을 빨아 당겼다. 외국인 유튜버의 친구들은 산 낙지를 기겁하면서 입으로 넣었고 외국인 유튜버는 캬갸갹 킬킬거렸다.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았다. 라면을 다시 후루룹 빨아올리면서 스크롤을 휘리릭 내렸다. 의미 없는 자음들이 한가득 이었다.

지마켓을 열었다. 산 낙지를 검색해봤다. 10마리 55,000원 장바구니에 넣었다. 다시 유튜브로 갔다. 검색창에 아이돌이라고 검색했다. '여자아이돌최신노래모음' 재생목록에 '모두 재생'을 클릭했다.


'저기요. 제가 님 인스타 사진 봤는데 제가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더라고요. 따지려는 건 아니니까 답해주시죠.'


디엠이 또 와있었다.


인스타에 올린 사진들을 죽 훑었다. 포토샵으로 보정을 다시 한 것들인데 저 새끼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짜증이 났다.


어디에도 직접 가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다 가볼 수 있다. 여기 이 동네뿐만 아니라 드라마에 나왔던 머나먼 동유럽의 어느 도시 골목까지 다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밖에 나갔을 때 보았던 동네 슈퍼가 사라지고 카페로 바뀐 것도 인터넷 지도의 최근 스트리트 뷰를 보고 알았다.



어디에도 댓글이나 '좋아요'를 남기지 않는다. 진정한 히키코모리로서의 생활은 온라인상에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혼자임을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로 잡아야 이 생활을 지킬 수 있다. 오직 보기만 한다. 보다가 마음에 드는 건 스마트폰으로 화면 캡처를 한다. 인스타에 올린 모든 여행 사진이 그렇게 모은 것이다. 캡처하고 포토샵으로 각도 변형하고 색감 좀 만져주고 쓸데없는 것들 좀 지우면 전혀 다른 사진이 된다. 좀 더 현장감이 있으려면 관광지가 아닌 보통 거리나 골목 사진도 있어야 하는데 그건 인터넷 지도 스트리트 뷰를 캡처해서 크롭 하고 보정하면 된다. 그다음 그 지역의 음식 사진을 이어서 딱 올려만 주면 그럴듯한 여행스타그래머가 되는 것이다. 그 지역의 날씨나 사람들과의 갈등도 걱정 없다. 웬만한 여행 에피소드는 블로거들 글을 좀 각색하면 지어낼 수 있겠지만 잘못 걸리면 신상 털리고 주작 들통나기 때문에 글은 해시태그만 올린다. #여행스타그램 #레 #인도 #INDIA #LEH #TRAVEL #PHOTO 등등 해시태그는 좋아요 많은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따라서 달면 된다. 이렇게 해서 인스타그램에서는 세계 12개국을 여행한 엄연한 여행자이자 포토그래퍼가 된다. 요즘 제법 좋아요도 많아지고 있는 편이었다. 아마 저 새끼도 그래서 찾아내서 디엠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최근 레라는 도시의 황량하면서도 드넓은 풍경과 청명한 하늘에 빠져서 사진 몇 개를 모아서 올렸는데 그중에 하나가 저 새끼 사진인가 보다.


'저기요. 님 사진 구글 스트리트뷰 캡처한 것도 있다는 거 알거든요.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요. 제 취미도 구글로 여행했던 곳 가보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은 퇴근하고 싶을 땐 스트리트 뷰로 집으로 가는 길을 보고 그런다잖아요. 그러니까 메시지 한 번만 주세요.'


질긴 놈.


전 제 인스타에 가본 적 있다고 한 적 없거든요. 그냥 저기 저곳들을 본 적은 있는 거죠. 'I have been'이 아니라 'l have seen' 이라고요.


ㅎㅎ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직접 가보신 적은 없는 거잖아요. 직접 가 보실래요. 레에? 저희가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돈을 벌면서 여행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VR 체험 서비스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여행 가서 만든 데이터를 제공하면 그걸로 VR 체험 콘텐츠를 만든다고 했다. 거기에 직접 실시간 라이브로 영상을 보내면 특별하게 만들어진 VR룸에서 고객이 바로 현장에 여행을 간 것처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레는 가기 쉽지 않은 오지 같은 곳이지만 오지 중에서도 비교적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라서 빨리 데이터를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정말 레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정말 괜찮은 곳이에요. 공기도 좋고 사람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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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오른쪽으로 가요. 내가 가라는 데로 안 가면 계약위반입니다. 귀국할 돈 없어지는 거 알죠?


레에 갔다. 그들은 여행을 가는데 필요한 모든 경비를 제공해줬다. 비행기로 가면 빨리 갈 수 있었지만. 그들은 험난한 육로의 데이터를 원했다. 굽이굽이 꼬부랑 산길을 며칠을 걸려 올라가야 했다. 매일 영상과 사진 데이터를 전송했다. 레에 도착하자 실시간 라이브 테스트를 한다고 했다. 360도 카메라를 비롯한 여러 장비를 착용하고 레의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인터넷 지도 스트리트 뷰로 봤던 레 팰리스를 가보고 싶었지만 내 의지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저들이 원하는 곳으로 하지 않으면 돌아갈 돈을 받을 수 없다.


왜 이렇게 카메라가 흔들립니까? 똑바로 제대로 가주시면 좋겠네요. 그렇지. 그렇게 쭉 가봅시다. 그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라다크 브레드를 파는 가게가 나온다니까 그쪽으로 가봐요. 아 거참 되게 헐떡거리시네.


숨이 찼다. 머리도 아픈 것 같았다. 고산병인가 걱정이 되었다. 비행기로 바로 급하게 올라온 게 아니면 고산병에 걸릴 확률이 낮다고 했는데 몸이 불길한 신호를 자꾸 보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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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아무 자극이 없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VR헤드기어를 벗고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숨을 쉴 수 없다. 여긴 LCL 용액 속이다. 하이퍼리얼플러그 안이다. 하이퍼리얼플러그는 완벽한 VR 체험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 물탱크다. 에반게리온이 생각나서 그 탱크를 채운 용액을 LCL용액이라고 불렀다. 인체와 같은 농도의 염분을 포함한 특수한 용액으로 채워진 탱크 안에서 부력으로 자유롭게 떠 있으면서 몸을 움직일 수 있다. 실제로 여행지에 있는 사람과 연결되어 이 안에서 마치 여행을 하는 것처럼 체험할 수 있다. 레에 있는 VR릭샤왈라에게 좀 다그쳤더니 접속을 끊어 버린 것인가? 기획실 직원이 섭외해 온 녀석인데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다고 하더니 어리바리해서 속을 좀 썩였다. 그래도 접속을 끊어버리면 바로 계약위반사항으로 위약금을 물게 해 놨으니 그러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연결이 끊기더라도 제어 센터에서 접속이 끊겼다는 알림이 나올 텐데 알림도 없다. 몸이 떠 있으니까 방향감각이 불분명하다. 점점 답답해진다.


숨이 찼다. 머리도 아픈 것 같았다. VR헤드기어 안으로 공기가 들어오지 않고 있나?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완벽한 차단이 저기와의 생생한 연결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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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나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 센터가 있는 지역을 담당하는 통신사의 지사에 불이 났다. 하이퍼리얼플러그는 고도의 네트워크로 제어되고 있었다. 통신사의 케이블이 타버리자 제어는 먹통이 되었다. 안에 있던 사람은 시체로 건져졌다. 통신사는 긴급대처에 들어갔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통신사는 자동제어로 이루어지는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관리직원들을 대폭 감원했었다. 직접 소화 장비를 들고 바로 달려갔어야 할 사람도 관리 기계실의 문고리를 돌릴 손도 없었다. 통신사의 경비 시스템과 결제시스템을 이용하던 지역의 가게들이 피해를 입었다. 와이파이도 뜨지 않았고 카톡도 되지 않았고 SNS의 타임라인도 멈췄다. 통신사에서는 케이블만 잔뜩 있는 설비공간에서 화재가 난 것이었기 때문에 화재로 인한 인명피해는 없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통신 두절로 인한 피해보상은 추후 구체적으로 밝히겠다고 밝혔다.  장애 지역을 벗어나 속보를 접하게 된 사람은 한 번 짜증을 냈지만 이내 다시 톡을 하고 스마트폰 화면 위의 손가락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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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연결이 끊기고 나서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가보고 싶던 레 팰리스로 향했다. 두꺼운 벽으로 구획이 된 내부의 선선한 공기가 더위를 식혀줬다. 창으로는 타운 전체의 모습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후~ 하~~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뱉었다. 연결이 끊긴 장비를 벗어 백팩에 집어넣어 버리고 다시 한번 풍경을 바라보았다. 두통이 싹 가시는 듯했다.


레 팰리스 옆에 있는 스투파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발자국이 옆으로 슥슥 옅어지고 있었다. 흙먼지가 발자국과 스치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스투파에서 길게 늘어 뜨러 진 룽타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옆으로 지나가던 사람에게 '쥴레'라고 인사를 건넸다. 사람 좋은 미소로 손을 모으며 '쥴레'라고 답해주었다. 짧은 순간에 그 사람 눈가의 주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주름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말 괜찮은 곳이에요. 공기도 좋고 사람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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