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기 May 21. 2019

흉터 이전

혹은 버려지기 이전에  

둘째는 덜 성가셨다. 잠시 업어주면 바로 잠이 들었고 분유를 먹이고 눕혀도 바로 잠이 들었다. 울먹일 때 공갈 젖꼭지를 물리면 바로 그쳤다. 다행이었다. 첫째는 난감했다. 아이는 분유 젖병이 입에 닿으면 울었고 직접 젖을 물려야 먹었다. 잠이 오면 울었고 잠이 깨도 울었다. 안아줘도 울었고 바닥에 눕히면 더 울었다. 울다가 자기 울음소리에 놀라 또 울었다. 그녀는 오후에 피아노를 가르쳐야 했다. 첫째가 젖을 먹은 후에도 잠들지 않으면 보자기로 싸 업고 피아노를 가르쳐야 했다. 그것도 아이가 피아노 소리에 울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교습을 받는 국민학생의 연주가 오선지 한 줄도 내려가지 못할 때면, 가슴을 누르는 보자기가 불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생각이 달랐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에게 독립심이 강한 사람으로 키우겠노라 말했다. 한 끼 밥상도 손수 차려 먹지 않는 그가 독립심 운운하는 게 웃겼다. 그냥 자식들에게 부모로서 할 일을 못 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들렸다. 실제로 그녀가 피아니스트가 되는 데에 아버지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르바이트해서 직접 번 돈으로 피아노 교습소에 다녔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교습소에 오는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번 돈으로 피아노를 샀다. 그러나 더는 피아노를 배우러 갈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교습소 대신 시집을 보내버렸다.


그녀는 얼굴 몇 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했다. 남자는 그녀보다 여덟 살이 많았다. 남자의 집에 가구는 여덟 개도 되지 않았다. 그 남자의 아버지, 그 남자의 어머니가 함께 사는 황망한 집에 그녀와 그녀의 피아노가 들어갔다. 몇 개월 후 첫째가 그녀의 뱃속에 들어섰다.


그녀는 다시 피아노를 쳐야 했다. 아니 가르쳐야 했다. 피아노 교습으로 돈을 벌어 가구가 여덟 개도 되지 않는 집을 채워 나갔다. 재봉틀도 사고 그릇도 샀다. 냉장고를 사고 텔레비전도 샀다. 그동안 그녀는 체르니 이상의 피아노곡은 듣지 못했다. 집은 여러 가지 세간살이로 채워졌지만, 교습소로 쓰이는 그녀의 신혼 방에는 바이엘 연습 소리만 가득 쌓여갔다.


첫째가 잠이 들었다. 좀처럼 울지 않는 둘째는 조용히 혼자 방바닥을 문지르고 있다. 언제 깨서 저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부엌에서 보리차를 아궁이에 올려놓고 설거지를 했다. 기저귀를 널고 곧 피아노를 가르쳐야 할 신혼 방을 청소했다. 물 주전자를 방에 들여놓을 때쯤 학생이 왔다. 학생에게 8 음계를 오르내리며 손가락을 풀게 하고 아기가 있는 방을 확인했다. 첫째는 아직 자고 둘째는 혼자서도 잘 놀고 있다. 학생의 피아노 소리가 부드럽다. 바이엘 한 페이지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옳지, 그렇게, 그렇지’ 하며 피아노 곁으로 갔다.


수업이 끝날 때쯤 첫째의 칭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잘하지도 않는 칭찬을 학생에게 해주며 급히 수업을 마쳤다. 아기에게 갔다. 울기 직전의 첫째를 냉큼 안아 올렸다. 아직 머릿속을 맴도는 바이엘 리듬을 따라 몸을 흔들며 첫째를 달랬다. 동시에 둘째의 아랫도리를 만져 보았다. 기저귀가 묵직했다. 보자기로 첫째를 업고 갈아입힐 둘째의 옷과 기저귀를 꺼내왔다. 옷을 벗긴 둘째의 엉덩이를 닦고 보송한 기저귀 부채질로 말렸다. 기저귀를 채우려니 윗도리도 젖어있다. 둘째를 앉히고 팔을 들어 만세를 시켰다. 옷을 위로 벗기는데 팔이 잘 빠지지 않았다. 머리를 빼고 팔을 하나씩 뺐다. 오른팔 소매가 마른 콧물처럼 빳빳했다. 콧물이 아니었다. 옷이 팔에 붙어있었다. 불그스름하게 익은 피부가 옷에 배 떨어지지 않았다. 둘째는 울지도 않았지만 그녀 귓속에선 울음이 가운데 페달을 밟은 피아노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주전자 옆에 고인 물이 보였다. 뜨거운 물이 둘째의 팔을 지졌고 그녀의 억장까지 지졌다.


공원에서 우리를 놔두고 가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의 엄마는 아마 이렇게 살아내고 있었을테다

우리만 없었으면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엄마에 대한 원망 나아가 아빠에 대한 원망이 미안함과 자책으로 이어진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계속 흐르게 되는 우울 증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