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기머리를 하고 있었다. 트로피를 들고 있는 모니터 속 배우는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일약 스타가 된 정호연 배우가 윤기 나는 흑발에 찬란하게 검은 드레스와 셋업 된 댕기를 하고 주변을 환하게 맑게 밝히는 웃음으로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섬광을 다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다. 전 세계가 댕기머리 스타일에 주목하였다는 기사들을 스크롤하고 클릭을 하다 보니 이제는 애플 TV 시리즈 파친코의 선자가 댕기머리를 하고 나왔다. 주요 등장인물이 온통 분홍 붉은 파친코장에서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어린 선자가 폴짝이며 춤을 추니까 그의 머리에 달린 붉은 댕기가 바닷속에서 물을 박차는 해파리처럼 공중에서 리듬을 맞춘다.
예전에 인상에 깊게 남는 댕기머리를 본 적이 한 번 있는데 그 댕기는 어린 선자의 것에 가까웠다. 댕기머리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검붉은 댕기는 차가 덜컹거려도 바람이 불어도 미동도 없었다. 택시 조수석에 앉아있는 내 앞에 앉아있는 … 것이 맞나? 내 앞에 앉아있는데 거긴 차창 밖이다. 택시 전면 유리창 밖 보닛 위에 앉아 있었다.
‘기사 아저씨 차 앞에 사람이 앉아 있어요.’
라고 말하려다 시속 80km를 유지하며 아무 일 없이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는 택시 위에 사람이 앉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아침에 퇴근하는 길 택시 안이었다. 며칠 째 철야 근무를 하였고 2시간쯤 자고 다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꿈속 장면이 서늘한 아침 공기에 얼어 머리 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던 게 아닐까? 사진을 찍어 놓았더라면 헛것을 본 건지 아닌지 더 확실해졌을 텐데 그때는 그 생각을 못했다.
멍든 마음 손에 들고 - 한대수의 노래 제목
나는 내 아픔을 몰랐다. 그냥 피곤하고 좀 지친 것이라 여겼다. 조금이나마 숙면하기 위해 촉박한 시간을 붙잡고 샤워를 한 후 자고 일어나도 어깨가 천근이고 머리가 만근이었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나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며 서있을 때면,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졸음이 시간을 한 움큼 기억에서 솎아내 버렸다. 기억을 대신해 모니터 속에는 같은 자판이 연달아 길게 흔적을 남겨 두었고(백스페이스가 아닌 게 다행) 지하철 열차는 잃어버린 기억만큼 돌아와야 하는 다음다음 다음다음 역에서 나를 내려 주었다. 그래도 푹 좀 자면, 쉬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좀 쉴 날이 오겠지. 택시 보닛 위 댕기머리를 보고 나서야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는 건가 덜컥 겁이 났다. 가로수가 심연의 넋을 기리는 수많은 노란 리본을 매고 봄바람에 가지를 흔들기 시작한 해에 나는 퇴사하였다.
쉬면서 집에서 혼자 울컥해서 울곤 했다. 멍든 마음 손에 들고 설거지를 하면서, 빨래를 하면서, 압력밥솥에 증기 빠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울었다. 무기력한 내가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면 멍든 마음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 마음을 주우려 방바닥에 앉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또 누웠다. 그렇게 지내다가 다시 건축설계 프리랜서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5년이 지나고 코로나가 왔다. 염두에 두었던 여행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 어딘가 익숙한 늪에 여행의 발목이 잡히자 언젠가 느꼈던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 멍든 마음 손에 들고 병원에 갔다.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다.
우울이 심해지면서 글을 쓰기 힘들었다. 집중력이 약해져서 글은 모니터에 파편처럼 흩뿌려졌다. 전전두엽 주름 속을 후벼 꺼낸 단어 하나를 포스트잇에 긁적이고 겨우 순서를 맞춰 덧붙이는 것처럼 쓸 수밖에 없었다. 몸에 닥치는 새로운 경험들은 우울의 증상인지 항우울제의 부작용인지 헷갈렸다. 낮에는 입맛이 없다가 밤에는 뭐든 다 먹고 싶었다. 침대가 나를 이렇게나 좋아했었나 아침마다 꽤나 질척거리며 나를 붙잡았다. 햇볕을 보면 좀 낫다고 해서 창가에 서니 밑으로 떨어지려는 내가 그려졌다. 유려하고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세련되게 매력적으로 힙하게 나의 우울을 보여주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저기 저 먼 곳에 이상적인 나를 두고 거기에 닿지 못하는 지금의 나를 못마땅해하는 게 우울의 주된 작동방식이다.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은 끊임없는 자기혐오로 이어지고 우울을 더 깊게 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 존재 자체로 괜찮다. 우울이 나의 전부가 아니다는 것을 현정이가 옆에서 계속 알아차리게 해주지 않았다면 그 진창 속으로 계속 빠져들었을 것이다. 일단 뱉어 놓자. 우울과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것에 의의를 두고 계속 썼다.
우울은 나의 힘. 나의 친구. 차나 한 잔 하고 가던 길 가시게. ‘그 차에는 알프라낙스, 프록틴, 졸민 등이 들어있지만’ 의심하지 말고 한 잔 하고 가시게. 그렇게 1년간 우울과 사귀었고 약도 안 먹는 지금은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 수전 손택, 앤 보이어 ‘언다잉’에서 봄-
좀 덜 아프니까 여유가 있다. 앞으로 아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남의 아픔에는 어떻게 해줘야 할까? 대신 아플 수도 없는데. 현정이는 나에게 어떻게 해줬었지?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중력과 같은 것이다. 이 땅에 사는 한 함께 살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아픔의 말은 중력의 방향으로 향하는 게 많다. 마음이 무겁다. 어깨가 무겁다. 몸이 축 쳐진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프고 늙고 그러면 얼굴에서 찢어진 부분들 눈가와 입가는 중력을 따라 쳐진다. 중력에 버티는 게 살아가는 것이다.
고통은 감내하는 것은 그 반대 방향이다. 올라간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추앙하라고 하지 않는가. 추앙의 ‘앙’은 올려보다 우러러보다를 뜻하는 한자다. 그 말이 곧 응원한다는 말이라는데 응원도 치어 ‘업!’이니까 중력과 반대다. 영화 ‘돈 룩업’에서는 올려다보지 마라고 한다. 영화에서 올려다보는 행위는 다가올 고통을 대면하는 것이다. 지구가 완전 파괴되게 생겼는데, 이러다 다 죽게 생겼는데 한편에선 그 고통과 대면하지 말고 눈 깔라고, 앞만 보라고 한다. 종교는 고통과 멀어지고 싶은 욕망으로 위로 위로 올라간다. 첨탑을 쌓고 거대한 동상을 세운다. 그러고 보니 위를 향하는 것도 계속 올라가기만 하면 별로인 것 같다. 한 방향만 고집하면 다른 게 잘 안 보인다. 너무 높이 가면 아래로 떨어지는 존재들이 너무 작게 보인다. 내가 올라가면 아래로 아픔으로 심지어 죽음으로 떨어지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어도 마음은 곁에 두어야 한다. 현정이가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아래로 떨어져도 늘 곁에 있어줬다. 파친코의 선자가 험난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늘 조건 없이 보살핀 어미와 아비가 마음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갈망하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판다로스 ,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 첫 장에서 봄-
아빠는 손가락 두 개가 없다. 퇴직하고 다시 일을 하시다가 기계에 잘려 나갔다. 아빠한테는 인공 손가락이 있다. 어릴 때 엄지를 떼었다 붙였다 하는 마술 놀이 장난감으로 보았던 분홍색 고무 손가락과는 사뭇 달랐다. 세밀했다. 손가락 부분마다 색깔이 달랐다. 손가락 끝은 붉은 기가 돌았고 바닥과 관절과 관절 사이 부분의 색깔이 모두 달랐다. 지문의 무늬도 보였다. 손톱 뿌리는 둥그런 산에 빼꼼히 걸린 달처럼 하얀 빛을 띠고 있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이것을 아픈 곳에 끼울 사람들을 위해 손가락을 얼마나 자세히 관찰한 것일까?
우울했을 때 밖으로 나갈 기운이 없어 사진도 별로 찍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좁은 이 집 안을 아주 확대해서 보면 좁은 집도 넓게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이크로 렌즈를 사서 이 물건 저 물건 내 손등 손바닥 혓바닥 입 속의 피부 등을 찍어 보았다. 찍다 보니 매끈한 줄 알았던 옷이 가는 실들이 엮이고 엮여 ‘열일’해서 부드럽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보였다. 이 색깔 아니면 저 색깔 그렇게 뭉뚱그려서는 아픔을 헤아릴 수 없다. 힘이 닿는 한 세심하게 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손가락 사이에 아빠의 인공 손가락을 가만히 놓아 보았다. 별로 닮고 싶지 않은 아빠인데, 나의 손이 누군가 세밀하게 만들어준 아빠의 인공 손가락과 닮아 보였다.
현정이가 배가 아팠다. 몇 번을 토했다. 급하게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서 한참을 기다렸다. 진통제를 우선 처방받고 검사를 해보니 보통 맹장이라고 부르는 충수염이었다. 수술을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병원 복도 의자를 보았다. 환자와 보호자들은 아픔의 중력에 고개를 버티지 못하고 등받이 위의 벽에 머리를 기댄다. 고통의 더께가 돌에 스며들어 물들어 있었다. 함께 아픔을 버텨낸 시간이 돌을 물들여놓은 것으로 보였다. 기다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함께 있어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분명 현정이에게 필요할 통증 주사를 추가로 신청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수술을 하고 나온 현정이는 또 나더러 늦으면 집에 가서 자라고 한다. 나는 집에 가서 잤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이 상황에 맞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변기. 오예 빙고!”
“변기가 어떻게 물건이냐!”
“어쨌든 집에 있는 사물이니까 되는 거지.”
“우와 참나.”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돌아와 현정이와 집에 있는 물건 맞추기 빙고를 했다. 쓸데없는 일로 병원의 시간을 함께 죽여줬다. 옥상으로 산책을 했고 시끄러운 옆 침상의 환자 가족의 흉을 봐줬다. 소곤소곤. 가까이에 있었다.
침착맨이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말했다. 결혼생활이란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 되어주는 것, 억울한 일을 억울하지 않게 지켜보는 것, 오늘따라 평소와는 다른 상대방에게 갸우뚱하는 것이라고. 비단 부부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남이 아프면 대신 아플 수는 없지만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은 있다. 조심스럽게 지켜봐 줄 수는 있다. 이 정도의 일이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도 한다. 생각은 차치하고 일단 타인의 고통을 위해 무언가를 하면 그 영향력의 크고 작음을 떠나 나의 기분이 좋다.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뭐든 하면 좋다. ‘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의 기분이 좋은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래야 오랫동안 타인의 아픔을 지켜볼 수 있다.
카뮈가 자동차 보닛을 어깨에 이고 걸어온다. 오사무의 손을 놓은 도미에가 옷깃의 물기를 짜며 걸어온다. 다이앤도 있고 프란체스카도 있다. 안녕 실비아. 안녕 버지니아. 수전이 암덩이를 손에 들고 다가온다. 모두 멍든 마음 손에 들고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걷는다. 내 곁으로 와서 둥글게 앉는다. 카뮈가 자동차 보닛을 해변의 백사장에 꽂자 모두가 멍든 마음 들었던 손으로 서로를 쓰다듬는다. 서로를 본다. 어디선가 툭 나온 어린 선자가 폴짝폴짝 다시 춤을 춘다.
나는 생각한다.
카뮈가 죽은 마흔일곱이 되기 전에 무언가 만들어 놔야겠다고. 그리고 만약 그때까지 못한다면…
더 오래 산 작가를 찾아볼 거라고.
멍든 마음 손에 들고
쓰고 또 찍어볼 거라고.